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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칼럼+옴부즈만

자존감 절제를 상실한 순간을 공개하는 최루성 뉴스는 그만

 이영미 대중문화평론가

나는 김제동의 따뜻한 개그를 좋아하는 편이다. ‘편이다’라는 표현을 쓴 것은 가끔 그의 따뜻함이 도를 지나칠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근년 들어 그가 신문 연예면이 아니라 사회면·정치면에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그의 이미지가 이전보다 다소 꿋꿋해져서 좀 더 솔직하고 편안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가 한창 ‘잘 나가는’ 개그맨으로 승승장구 달려가던 시절, 그의 따뜻함은 자주 도를 지나치고 있었다.


 일요일 저녁 <해피 선데이>에서 그는 해외입양아 가족상봉 코너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즐거운 예능 프로그램 한가운데에 배치되어 진한 감동과 눈물을 요구하는 코너였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진행자 김제동은 종종 주인공의 눈물을 노골적으로 요구했다. 해외 입양아로 힘겨웠던 이야기를 하면서도 애써 담담함을 유지하고 있던 출연자에게 김제동은 늘 “많이 우셨어요?”라는 질문을 여러 번 던졌고, 어느 날 나는 그 질문이 세 번째 나오는 순간을 참지 못하고 결국 채널을 돌려버렸다. ‘깔깔 모드’의 앞 코너에서 갑자기 ‘찡한 감동 모드’로 급변하려면 자극적인 최루적(催淚的) 대목이 필요하다는 것을 계산한 진행자의 고충을 모르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렇게 ‘울어 주세요’라고 요구하는 건 아니다 싶었다.

 하지만 이것이 김제동만의 잘못이겠는가.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눈물을 터뜨리는 장면이 지닌 그 강한 자극성으로 시청률을 손쉽게 끌어올리는 우리 방송의 관행, 그리고 이를 용인하면서 결국 이런 대목을 달콤하게 소비하는 우리 시청자들이 더 근본적인 문제의 근원일 터이다. 그래도 이 코너는 자발적 출연을 전제로 한 것이란 점에서 다소 봐줄 여지가 있다. ‘최루성’의 의도를 정말 견딜 수 없는 것은 뉴스이다.

 
 서해교전이든 대형 교통사고이든, 이렇게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한 끔찍한 사고가 있을 때마다 뉴스 프로그램의 카메라는 사망자의 유족들을 비춰준다. 그들의 집, 영안실, 장례식, 장지 등을 따라다니면서 사망자의 부모, 배우자들이 통곡하는 모습을 담고, 때때로 마이크를 들이댄다. 세상의 어느 부모가 생떼 같은 아들딸을 졸지에 떠나보내고 정신을 차릴 수 있겠는가! 어느 아내와 남편이, 하루아침에 배우자를 잃고 제 정신으로 인터뷰를 할 수 있겠는가! 이들은 눈물·콧물을 쏟고, 옷이나 방바닥을 쥐어뜯고, 그러고서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몸부림을 치다가 실신하기도 한다. 이런 모습이 고스란히 카메라에 잡혀 공중파 뉴스를 통해 전 국민에게 배달되고, 의도대로 시청자들은 함께 눈물을 흘린다.


 이들의 고통과 슬픔을 온 국민이 공유하고, 다시는 이런 끔찍한 사건이 없어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킨다는 의도는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내가 유족이라면 어떨까. 이렇게 정신을 차릴 수 없도록 황망한 순간을, 친지나 이웃도 아니고 온 국민에 드러내 보이고 싶을까. 그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아니 이 표현은 너무 약하다. 이건 거의 인권유린 수준이다. 인간으로서의 자존감과 절제를 완전히 상실한 순간을 포착해서 온 국민에게 공개하다니!


*한 사건 희생자의 빈소 모습. 경향신문자료사진

 뉴스가 해야 할 일은, 이런 사건·사고가 일어난 정황을 정확하게 보도하고 원인을 분석하며 재발하지 않는 방법을 논의하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의 뉴스는, 이러한 이성적인 인식보다는 분노·슬픔 같은 감정적 고양에 초점을 두는 것처럼 보인다. 뉴스의 본령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일이다. 이런 최루적 장면이, 사건의 위중함을 충격적으로 전달하기 편하다는 것쯤을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이 방법은 뉴스의 정도가 아니며, 게다가 유족의 자존심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나쁜 일이다. 최루성 뉴스, 좀 그만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