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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칼럼+옴부즈만

[정동칼럼]‘카파이즘’과 뉴스타파

전설적인 종군기자 로버트 카파의 사진전이 열린다고 한다. 카파는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의 한가운데서 죽어가는 병사들을 담아낸 것으로 유명하다. 세계 곳곳의 전장을 누비다 1954년 인도차이나에서 지뢰를 밟고 숨진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당신의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은 건 충분히 다가가지 않아서다.”


누구에게, 얼마나 다가가야 하는지는 작품이 말한다. 1939년 스페인 내전에서 머리에 적탄을 맞은 병사의 모습을 담은 ‘공화파 병사의 죽음’을 보자. 한 인생이 불과 1㎝ 쇠붙이와 등가가 되는 찰나의 그 순간만큼 전쟁의 잔혹함과 어리석음을 간결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전장은 그에게 적의 가득한 공간이지만, 모두가 피해자인 공간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셔터를 눌렀던 그 자리는 진실을 보기 위해 충분히 다가선 자리, 현실의 이해타산을 내려놓아야 설 수 있는 자리, 목숨이 위태로운 자리가 아니었을까? 그러니 ‘카파이즘’은 특수한 이해관계를 내려놓고 보편적 피해자를 향해 실체가 보일 때까지 다가서라는 요구로 볼 수 있다.



이 요구에 충실한 언론은 드물다. 대개는 안하고 못한다. 오히려 거꾸로 가는 축이 더 많다. 보편적 피해자와 거리를 두고, 특수한 이해당사자와 밀착한다. 최근의 이라크 전쟁보도를 보라. 기자들 대부분이 미군의 ‘임베딩 시스템’을 통해 그들과 동행하며 취재하지 않던가. 이걸 두고 보편적 피해자에게 충분히 다가갔다고 할 수 있을까? 아마 카파라면 미군의 화력에 무참히 죽어갔을 이라크군의 진영을 그 전쟁의 보편적 피해자의 장소로 설정하지 않았을까?


전쟁당사자의 보도통제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한국전 때도 맥아더의 보도통제는 유명했다. 그래서 한 외신기자는 “전쟁으로 가장 먼저 잃어버린 것은 진실이다”라는 말까지 남겼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17명의 외국기자들이 전선에서 취재하다 사망했다. 통제에 순응하지 않고, 더러 소속사의 규칙까지 어기면서 충분히 다가가려 했던 기자들일 것이다. 이윤추구에 점점 몰두하는 현대의 상업적 언론기업이 그나마 저널리즘의 주체로 명맥을 유지하는 것도 이런 기자들 덕분일 것이다. 그런데 지금, 국정원의 대선개입 의제가 국정원의 깜짝쇼와 언론의 맞장구로 삽시간에 NLL 포기 논란으로 대체되는 한국 사회에 도대체 이런 기자들이 있기나 한 것일까?


기자가 ‘카파이즘’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정치권력의 통제에 영향 받지 않아야 하고, 광고주의 압력과 사주의 경제적 통제에 저항할 수 있어야 하며, 기자 스스로가 고도의 전문성과 윤리의식으로 무장돼 있어야 한다. 이런 조건을 갖춘 언론사는 없지만, 기자 개개인은 적지 않다. 그래서 이런 상상이 가능하다. “세 가지 조건을 갖춘 기자들만 모여서 ‘공포의 외인구단’ 같은 뉴스매체를 만들면 어떨까?”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인터넷 독립언론인 뉴스타파가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와의 공동 작업을 통해 확인한 '조세피난처 프로젝트' 4차 명단을 발표하고 있다. (경향DB)


최근 조세회피처에 회사를 설립한 한국인 명단을 발표한 뉴스타파는 이렇게 탄생했다. 소수의 전직 언론인들이 뭉쳤고 시민이 후원자로 나섰다. 뉴스타파는 소수의 독립적 기자들이 사회 거악을 고발하는 저널리즘의 핵심적 활동을 한다는 점에서 부패하고 무기력한 제도 언론에 ‘대항적’이며, 재정이 100% 시민후원이란 점에서 ‘대안적’이다. 앞으로의 성패는 결국 시민참여의 지속성 여부에 달려 있다. 왜냐하면 기자들을 충분히 다가가게 하는 힘은 진실을 진정으로 알고 싶어 하는 ‘보편적 독자’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


‘보편적 독자’는 언제나 현재는 소수이지만, 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는 절대 다수였다. 기자가 ‘보편적 독자’의 존재를 의식할 때, 다시 말해 누군가의 진정성과 맞닿아 있다는 느낌을 가질 때, 진실에 다가서기 위한 고단한 취재노동은 연애 활동이 된다. 하지만 그 접속이 끊어지면, 곧바로 어리석은 다수의 꽁무니나 치근거리며 호들갑으로 세상을 속이는 위선자로 추락한다. 시민의 후원은 돈 문제를 넘어 진실을 진정으로 알고 싶은 ‘보편적 독자’의 존재를 기자들에게 고지하는 의미가 있다. 그 어느 때보다 ‘보편적 독자’로서 언론에 대한 시민의 관심과 참여가 필요한 시점이다.



남재일 | 경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