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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칼럼+옴부즈만

정치권의 의도된 의제, 언론이 걸러내야

정치세력들이 국면전환이나 돌파용 의제를 만드는 것은 국민들을 여론몰이의 대상으로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정한 의제를 설정하면 자신들에 대한 목표대중의 태도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근저에 깔려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들은 자신의 의제가 국민들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사건을 만들고 기자회견을 하는 등 언론플레이 한다. 이 경우 언론은 저널리즘철학이 말하는 매우 중대한 규범적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언론이 정치세력들의 의도된 의제를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정치세력들의 의도된 의제를 그대로 기사화하면 언론은 그들의 의제를 사회적으로 확산하는 기술적 통로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여론호도를 위한 의제설정 시도가 있다면 언론은 이를 무시하거나 보도하더라도 독자들이 그 의도를 간파할 수 있도록 해석적 프레임과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대개 정치권은 사회적 충격이 강한 의제들을 들고 나와 당파적 언론이 아니라도 기사화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새로운 국면들이 연이어 전개되면 현상중심이라는 뉴스상품의 특성으로 인해 언론이 간파한 해석적 프레임의 일관성을 놓치고 정치인들의 움직임을 쫓기 바쁜 보도가 되기 쉽다. 여기에 언론사나 기자의 정치성향이 개입되면 논조는 더욱 복잡하게 나타날 수 있다.


국회가 “2007년 제2차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녹음기록물 등 국가기록원 보관자료 제출 요구안”을 여야 합의로 처리했다. 민주국가의 기능자체를 포기하는 것이며 외교적 망신이라는 비판을 감수하면서 이 같은 상황을 전개한 이유가 ‘정쟁’이라는 지적이 지배적이다. 새누리당에 대해서는 국정원 여직원 댓글사건 국면을 전환하기 위한 수로 NLL공방을 시작했다는 분석이 많고, 민주당은 유리한 여론을 등에 업고 정국을 돌파하자는 의도와 당 내부세력들 간 정국 주도권 다툼의 맥락에서 이번 합의를 이끌었다는 분석이다.


정치세력들 간 의제를 둘러싼 정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간 누군가는 의제선점에 성공해 국면싸움에서 승리했고 누군가는 그로 인해 패배했다. 이번 사건의 특이점이 있다면 국정원 여직원 댓글사건을 둘러싼 의제싸움이 여야 각기 다른 이유로 정상회담 기록물 열람 및 공개라는 동일한 의제로 전화했다는 것뿐이다. 의제싸움의 국면을 조정한 것이 이번 국회의결의 본질인 것이다.


경향신문은 정치권의 이 같은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국회의결 이틀 후인 4일 “소모적 NLL공방, 무얼 위한 건가”라는 기사를 1면 머리로 올려 여권은 “국정원 정치개입 물타기용”이며 야권은 “힘겨루기식 대처”의 결과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특히 “외교의 기본인 신의와 비밀 원칙이 무시”됐고, 결국 “남북평화를 희생물 삼아 정쟁”을 하고 있다는 점을 강력히 비판했다. 관련기사들 역시 “회의록이 정쟁으로 공개”되는 것이고 앞으로도 이를 둘러싼 “끝도 없는 논쟁”이 펼쳐질 것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정쟁의 목적으로 도를 넘는 일을 했다는 질책이다. 독자들에게 정치권의 의도를 전달해 향후 전개될 여야 간의 공방을 어떤 맥락 속에서 읽어 내려가야 할지에 관한 해석적 프레임을 제시한 것이다. 정치권의 의도된 의제를 언론의 의제로 그대로 수용할 수 없다는 의지로 보인다.



하지만 이 같은 기조를 굳건히 유지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국회의결 직후 사설은 “차악의 선택”이라며 “대통령기록물 지정의 취지가 훼손된 것은 심히 유감이나 국회의 뜻은 존중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불필요한 논란을 종식하기 위해 불가피하다는 의원들의 총의가 담겼다”는 것이다. 정쟁으로 인해 “민주주의의 출발인 기록관리가 붕괴되었다”는 보도가 무색할 정도이다. “또 다른 분란은 안된다”는 경고는, 우리 정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순진한 고언처럼 들린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수행한 3명의 긴급 좌담회에서는 회의록 열람 및 공개에 관한 찬반양론을 나란히 소개하면서 “왜곡된 것을 바로잡아야 하니 회의록 원문 공개는 필요한 일”이라는 주장까지 인용됐다. 진실이 규명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방법이 민주주의의 기본가치를 심각히 훼손하는 것이라면 불가피하다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열람하더라도 정쟁이 끝없이 지속될 것이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열람을 통해 진실이 규명돼야 한다고 하는 것은 향후 벌어질 또 다른 정쟁의 공허한 진영논리를 앞서 듣는 것 같다.


정치인들에게 의존하는 취재관행, 정치권의 끝없는 의제싸움, 어제의 일조차 잊은 뉴스의 현상지향성, 언론인들이나 언론사들의 정치적 입장, 시대정신, 저널리즘의 원칙 등은 보도과정에서 끊임없이 부딪치며 때로는 모순적이고 간극이 있는 기사내용을 형성한다. 이를 극복하고 시대정신과 저널리즘의 원칙을 지키기 위한 숙의가 필요하다.



한동섭 | 한양대 교수·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