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시위 현장을 긴박하게 담아 올해 퓰리처 사진부문을 수상한 로이터 통신의 작품. 로이터 연합뉴스


“짧게 써라, 읽힐 것이다. 명료하게 써라, 이해될 것이다. 그림같이 써라, 기억에 남을 것이다.” 


현대 저널리즘의 창시자로 불리는 조지프 퓰리처(1847~1911)의 말이다. 18세 때 헝가리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퓰리처는 신문 기자·경영주로 성공하면서 언론의 전형을 제시했다. 그는 언론인을 ‘다리 위에서 국가라는 배를 감시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언론의 핵심을 권력의 감시견 역할로 봤다. 개혁을 지향하라, 부정부패에 항거하라, 불편부당하라, 힘없는 이들을 도우라고 언론에 주문했다. 


퓰리처는 또 하나의 얼굴로 기억된다. 정론의 수호자라는 명예의 이면에 ‘옐로 저널리즘’(황색 언론)의 원조라는 오명이 따른다. 퓰리처의 ‘뉴욕월드’와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의 ‘뉴욕저널’ 간의 진흙탕·출혈 경쟁에서 나온 얘기다. 둘은 발행부수를 늘리기 위해 선정적이고 과장된 기사를 경쟁적으로 실었다. 퓰리처는 “재미없는 신문은 죄악”이라고 했다. 도를 넘은 자극적 폭로 기사가 대서특필됐다. 쿠바의 독립운동을 놓고 스페인의 통치 상황을 잔혹한 내용으로 부풀려 쏟아내 미국·스페인 전쟁을 언론이 부추긴 것은 최악의 폐해 사례로 꼽힌다. 


퓰리처상은 언론계의 노벨상이라 불린다. 퓰리처가 남긴 기금과 유언에 따라 1917년에 제정됐다. 해마다 신문 저널리즘 분야에서 의미있는 기여자를 뽑아 시상한다. 올해 104회째를 맞은 퓰리처상은 미국 알래스카 지역 성폭력 문제 탐사보도와 홍콩 시위, 인도 카슈미르 지역 통제 관련 사진 보도를 한 기자와 매체들에 돌아갔다. 권력을 감시·견제하고 불의에 맞서 싸우며 약자 편에 서라는 퓰리처의 유지에 충분히 부합한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19 팬데믹과 더불어 거짓 정보가 전염병처럼 확산되는 인포데믹이 심각해진 올해의 퓰리처상은 퓰리처의 두 얼굴을 새삼 떠오르게 한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사망설로 인포데믹의 폐해를 모두 절감한 게 불과 수일 전이다. 말년에 시력을 잃은 퓰리처는 과장·소문·거짓말 경쟁을 했던 일을 후회하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신은 ‘(뉴욕)월드’를 위해 내 눈을 가져가신 게 틀림없어. 이제 ‘월드’는 완전히 자유로운 언론이 되지 않았나”라면서.


<차준철 논설위원 cheol@kyunghyang.com>

Posted by 미디어로그 칸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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