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미디어칼럼+옴부즈만

‘삼성 X파일 보도’ 진정 유죄인가


김서중|성공회대교수·신문방송학

사법부는 왜 필요할까? 법조문의 자구적 해석을 위해, 아니면 사회정의 실현을 위해? 당연히 후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최근 사법기관들이 내린 판단을 보면서 당위와 현실이 다르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미디어법 개정 절차가 위헌 위법했다고 판단했으면서도 날치기를 주도한 한나라당이 다수당으로 있는 국회보고 알아서 시정하라 했던 헌법재판소 판결에서 사회정의 실현 의지를 읽을 수 없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다른 최고 사법기관인 대법원이 소위 ‘삼성 X파일 보도’에 유죄 판결을 내려 사회정의 실현은커녕 사회정의 구현에 장애물이 되고 말았다.


‘삼성 X파일’은 옛 안기부 직원들이 1997년 이학수 당시 삼성그룹 회장 비서실장과 홍석현 중앙일보 사장이 대권 후보들에 대한 정치자금 제공을 논의한 대화를 도청해 만든 테이프를 의미한다.

대법원은 이 테이프에 들어 있는 내용을 보도했다는 이유로 MBC의 이상호 기자와 월간 조선 김연광 전 편집장에 대해 징역 6월, 자격정지 1년을 선고 유예한 원심을 확정했다.

대법원은 이들의 모의 내용이 ‘보도하지 않으면 공익에 대한 침해가 발생할 가능성이 현저할 정도의 공적인 관심 대상’이 아니라고 보았다.

현저할 정도가 되어야 보도할 수 있다는 말도 동의하기 어렵지만, 불법적인 정치자금에 대한 경고로 정치자금 제공을 모의한 적이 있음을 알리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공적 관심사인지를 대법원이 이해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외려 신기하다.

현대 선거는 대단히 많은 선거 자금을 필요로 하고, 당선자가 선거 자금을 대준 세력을 위한 정책을 펼치는 불법적 행위가 난무하고 있다. 그래서 이와 관련된 수없이 많은 재판이 진행되고 있음을 대법원 스스로 모를 리 없다.

더군다나 우리나라 최대 기업이라는 삼성의 실세와 가장 유력한 일간지 대표가 만나서 정치자금 제공을 모의했는데, 이들의 모의가 결국(?) 성사됐다면 그 대가가 어느 정도였을까? 아마도 국민 대다수의 삶에 손해를 끼칠 정도의 정책으로 보답하지 않았을까?

언론의 진정한 역할은 모의 사실 보도에서 더 나아가, 이에 근거해 1998년부터 삼성 우호적인 정책이 얼마나 시행되었는지 심층적으로 보도했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대법원은 모의에 관한 기초 사실도 보도하지 말라 하니 대법원 판결로 언론이 다시 위축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불법을 모의한 사람들을 보호할 권리가 정경유착을 감시, 고발하는 국민의 알 권리보다 더 클 수는 없다.

대법원은 또 이들이 모의한 시기가 보도로부터 8년 전이라서 보도 가치가 사라졌다고 보았다. 정치자금 제공 (모의)행위가 이때가 마지막이어서 이제 과거 속 한 쪽의 추억으로 돼버렸다면, 백번 양보해서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보도는 하지 말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현실이 그렇지 않음은 장삼이사가 다 안다. 대법관들이 이를 모르면 현실도 모르면서 판결하고 있으니 무자격이요, 알고도 그리 주장했다면 범법 세력을 비호하려 했다는 의구심에서 어찌 자유로울 수 있을까?

대법원은 또 모의한 사람들을 익명으로 처리하고 모의 내용을 압축 요약했어도 그 목적을 충분히 달성했을 것이라 했다. 익명으로 처리하고 모의내용을 압축했다면, 그건 사람들이 이미 인식하고 있는 정치의 한 단면을 다시 확인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이들을 조사해서 구체적인 정치자금 제공 행위를 파악하고 불법성을 가려내 재발하지 못하도록 경고하는 것이 언론의 공익성 실현이기 때문에 실명으로 있는 그대로 보도한 것이다.

대법원은 이런 진리를 부정한 것이다. 심지어 실명으로 보도했어도 모의한 사람들과 관련된 검사들은 무죄로 풀려났다. 익명이었다면 이들에 대한 수사 자체가 없었을지도 모르는 것이 현실이다.

항간에 우리 사회는 사법부가 움직인다는 말이 있다. 사법부가 모든 문제의 최종 판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언론이 바로 서려면 사법부가 바로 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