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차 라디오 방송 리포터인 이하나씨가 자주 꾸는 꿈은 시계의 분침이 57분을 가리키는데 옴짝달싹 못하는 것이다. 그녀는 평일 오전 11시57분부터 오후 4시57분까지 매 시간 MBC라디오의 두 채널을 통해 50초짜리 교통정보를 전한다. “교통정보를 제대로 전하려면 사람들의 마음을 역지사지로 헤아려야 해요. 왜 막히는 걸까, 어디까지 이렇게 막힐까, 다른 사람들은 어떤 길로 우회할까, … 그런 마음들이 또 다른 교통 흐름을 만들어내 뜻밖의 곳에서 정체가 빚어지기도 하니까요.”
그녀가 전하는 교통정보와 달리, 이씨는 MBC에서 지난 몇 년간 얼마나 가면 이 막힌 길이 뚫릴지 알 수 없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MBC 라디오 PD들이 제작을 거부한 올해 8월28일부터 김장겸 전 사장의 해임안이 가결되기까지는 마이크 앞에 앉을 때마다 ‘방송을 계속해야 하는 것인가’라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자동차 내비게이션 서비스도 발달했고, 인터넷으로 모든 정보를 다 접할 수 있는 세상에 라디오 교통방송이 무슨 쓸모가 있냐고들 하지만, 지금도 라디오가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창구인 분들이 계세요. 그런 생각에 방송을 접을 수는 없었지만, 매번 리포팅을 끝낼 때마다 제 이름을 말하고 싶지 않았죠.” 이씨가 만나는 청취자는, 두 손은 바삐 일하느라 잠시도 쉴 수 없어 오로지 귀를 열어놓는 것으로 세상과 연결되는 사람들이었다. 구두 수선공, 식당 보조, 의류 공장의 미싱사, 길거리 좌판 행상인, 택시와 버스 운전사, 택배기사, 세상 소식을 알려주는 것이라곤 라디오 한 대뿐인 쪽방촌의 주민들…. 그들을 만나고, 그들이 주인공이 될 수 있게 목소리를 전해주는 것이 이씨가 생각하는 라디오 리포터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이었다.
지난 몇 년간 이하나씨는 자신의 정체성이 지우개로 지워지는 백묵 글씨처럼 끊임없이 희미해지는 시간을 살았다. 그녀가 목소리를 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청취자’의 이야기는 ‘위에서 싫어하는 아이템’이거나 ‘녹음기에 담기면 안되는 주제’이기 일쑤였다.
2017년, 이씨는 그녀가 전하고자 하는 청취자들의 목소리를 찾기 위해 자신의 목소리를 냈다. 9월11일 이씨를 포함해 MBC 라디오국의 리포터 열두 명이 MBC 총파업 지지 성명서를 낸 것이다. 성명서를 낸 모든 리포터들은 그때도, 지금도 비정규직이다. 파업 공간의 ‘흔한’ 지지 성명서로 여겨졌을지 몰라도 그들에게는 ‘다시는 MBC에서 일을 얻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각오한 실천이었다. 이미 동료 리포터 여럿은 파업으로 인해 수입 0원인 ‘불의의 실직 사태’를 감수하고 있던 터였다.
“프로그램이 사라지거나, 함께 일하던 PD가 바뀌면 언제 일이 끊길지 알 수 없는 게 우리 생활이니까, ‘더 이상 잃을 게 뭐가 있겠어’ 하는 심정이었던가 봐요. 정작 마지막까지 고민했던 건, 이렇게 다 걸었는데 아무도 우리 목소리에 관심을 가져주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거였어요. 우린 이런 얘기도 주체적으로 못할 만큼 힘없고 나약한 존재들인가 싶었지만…. 촛불집회 때도 함께 힘을 실었잖아요?”
1996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던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심보르스카는 수상식 연설에서 시인이 발견하는 세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개별적인 단어를 가지고 일일이 고민할 필요가 없는 일상적인 대화에서는 모두들 거리낌없이 이런 표현들을 쓰곤 합니다. ‘평범한 세상’ ‘평범한 인생’ ‘평범한 사물의 순리’ …하지만 단어 하나하나가 모두 의미를 갖는 시어(詩語)의 세계에서는 그 어느 것 하나도 평범하거나 일상적이지 않습니다. 그 어떤 바위도, 그리고 그 위를 유유히 흘러가는 그 어떤 구름도. 그 어떤 날도, 그리고 그 뒤에 찾아오는 그 어떤 밤도. 아니,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이 세상의 모든 존재도.”(저서 <끝과 시작> 중)
시인의 세계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다. 눈에 뜨이지 않는 곳에서 2017년을 만들어낸 평범한 사람들 누구도, 평범하거나 일상적이지 않다. 오늘도 이하나씨는 57분 교통정보에서 ‘어디쯤이면 이 정체가 끝난다’고, 그러니 조금만 더 가 보자고,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다.
<정은령 | 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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