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이니 멤버였던 종현이 스물일곱 해의 삶을 스스로 마감했다. 일주일 전이다. 몇 시간 후, 대학병원 중환자실에 있던 네 명의 신생아가 연달아 사망했다. 병원 과실로 허망하게 짧디 짧은 생을 접어야 했다.
사흘 전, 제천시의 한 스포츠센터 건물에서 발생한 화재는 29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필리핀에서는 태풍 ‘덴빈’으로 인한 사망자가 최대 90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틀 전 인도 서부에서는 버스가 강으로 추락해 최소 32명이 숨졌다.
죽음은 언제나 가까이에 있다. 날씨가 추워지면 문상을 갈 일도 잦아진다. ‘호상’이라 부르는 죽음도 있지만, 남은 이들을 위로하기 위한 수사일 뿐, 어떤 죽음인들 안타깝지 않겠는가. 모든 죽음은 원통함을 품고 있다. 아무리 빈번하게 죽음을 목격하거나 전해듣는다 해도 절대 무감각해질 수 없는 일이다. 생명의 유한함과 죽음의 불가피함을 끊임없이 확인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의 원초적 의미를 심사숙고하는 경건한 순간이다.
그래서 누군가의 죽음을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도구로 사용할 때 분개할 수밖에 없다. ‘세월호’라는 단어가 집단적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현실에서, 야당 대표라는 이는 제천의 참사를 세월호와 비교하며 정치적 쟁점으로 삼는다. 티끌만 한 정치적 이익을 주워보겠다고 누군가의 원통한 죽음을 도구로 삼는 경우다.
슬픔을 흥밋거리로 만들어 클릭수 장사에 혈안이 된 언론사들도 마찬가지다. 손녀와 아내를 소환하고 ‘울음바다’ ‘대성통곡’ 같은 제목으로 치장한다. 죽음을 빈정대거나 희화화하는, 보고도 차마 믿기 어려운 댓글들이 종종 나타나는 것도 아마 공감능력 없는 자극적인 기사 탓이 클 것이다.
유명 연예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경우이기 때문에 종현의 죽음은 특히나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다. 이런 큰 ‘사건’을 앞에 두고 언론사들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포털 검색으로 확인을 해보니 관련 기사가 4000건 이상 생산되었다. ‘국가기간 통신사’인 연합뉴스 혼자서 73건이다. 2013년 한국기자협회가 제안한 ‘자살보도 권고기준’의 첫 번째 항목이 ‘언론은 자살에 대한 보도를 최소화해야 합니다’였다. 도대체 한 젊은 연예인의 죽음에 관한 기사가 한 회사에서 70개 이상 만들어지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종현의 유서가 공개되었을 때 MBC, SBS, JTBC의 메인 뉴스는 이를 보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KBS를 포함한 다른 방송사들은 유서 일부를 읽으며 ‘슬픔 포르노’를 만들었고, 특히 채널A는 4개 꼭지를 할애했다. ‘SBS 취재파일’에 따르면, SBS 보도국은 치열한 토론 끝에 유서 보도 및 파생 영상 제작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홈페이지 메인 화면에서도 빼기로 했다. 엄청난 트래픽을 포기하면서 내린 결정이다. 이런 ‘상식적인’ 보도 태도는 땅에 떨어진 언론의 신뢰도를 조금씩이라도 제고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하지만 같은 SBS의 <본격연예 한밤>에서는 종현의 마지막 모습이라며 별 의미도 없는 편의점 CCTV 화면을 반복 재생했다. 보도 프로그램이 아니니까 괜찮다고 말하지 말자. 이 화면은 타 언론사의 온라인 기사가 되어 다시 소비자들에게 전달되고 소비된다. 누구나 뉴스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소위 ‘웹 3.0’시대라지만, 여전히 대부분 정보의 원석은 언론사가 생산, 유통한 뉴스들이다. 죽음을 상품화하는 최초 계기는 여전히 언론사의 뉴스라는 뜻이다. <본격연예 한밤>의 제작진도 용케 얻은 이 영상이 시청률을 얼마나 올려줄지 궁금하지 않았을까?
매일같이 잡다한 사건 사고를 취재하는 기자들은 ‘죽음’을 대하는 자세가 보통 사람들과는 조금 다를 수 있으리라 짐작한다. 다소 의식적으로 죽음과 거리를 두는 자세를 가질 수도 있겠다. 기자로서 필요한 덕목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죽음을 ‘사건’ 하나로 무덤덤히 바라보는 것도 선정적인 기사를 쏟아내는 것만큼이나 문제적이다.
며칠 전 경향신문의 ‘기자칼럼’은 자살보도를 신중하게 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정작 종현은 “최악의 선택을 했”고 “남은 사람들에게 불행만을 더해”줬기 때문에 “나쁘다”고 결론을 내려버렸다. 아프다는 이유로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이 온당한가? 죽음 앞에서 좀 더 경건해질 수는 없었을까? 공감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지는 않았을까?
‘세월호’ 보도가 ‘참사’였다고 비판받은 것은 부정확한 기사 때문만은 아니었다. 세상을 뜬 아이들과 그 남은 가족들을 진정으로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기사거리’로 간주했던 일부 기자들 탓도 컸다.
지금, 종현의 자살과 신생아 사망, 제천의 화재를 다루는 보도는 과연 어떤가? ‘세월호’ 이후 한국 사회는 많이 변했는데, 제일 많이 변해야 했던 언론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많이 안타깝다.
<윤태진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미디어 뉴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설]지상파 3사 조건부 재허가가 의미하는 것 (0) | 2017.12.28 |
---|---|
[미디어 세상]무엇을 포기할 것인가? (0) | 2017.12.26 |
[공감]라디오 리포터 이하나씨의 2017년 (0) | 2017.12.20 |
[미디어 세상]정치의 매체화 (0) | 2017.12.18 |
[사설]탈북병사 수술 장면 CNN 공개에 대한 몇 가지 생각들 (0) | 2017.1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