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현지시간) 뉴질랜드 남섬 최대 도시 크라이스트처치의 이슬람사원 두 곳에서 총격사건이 발생해 50명이 희생됐다.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는 즉시 기자회견을 열고 사태 수습에 나섰다.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할 만큼 사건의 내용 자체도 충격이었지만, 아던 총리의 기자회견 장면도 다른 의미로 충격이었다.
TV 속 아던 총리 옆에 선 한 남성 때문이었다. 지난 18, 21일 기자회견에도 동행한 이 남성은 수어통역사였다. 총리와 함께한 화면에 잡힌 그는 실시간으로 총리의 말을 수어로 통역했다. 국내 시청자들도 비슷한 충격을 받은 듯했다. 한 시청자는 “방송사도 아닌 정부에서 수어통역사를 대동하는 모습은 처음 봤다”며 “선진국은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지난 14일 한국에서는 정반대의 광경이 펼쳐졌다. 이날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KBS 앞에서는 장애인단체 ‘장애의 벽을 허무는 사람들’의 기자회견이 열렸다. 지상파 방송사의 수어통역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이었다. 이들은 지난달 20일 국가인권위원회에 지상파 방송이 저녁 종합뉴스에 수어통역을 실시하게 해달라는 차별진정을 내기도 했다.
한국수화언어법과 장애인차별금지법은 수어통역 제공에 대한 의무를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지상파 3사는 방송통신위원회 ‘장애인 방송접근권 보장 고시’에 따라 방송시간 중 5%만 수어통역을 제공한다. 베트남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당시 방송사의 수어통역이 중단되는 바람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급하게 미국으로 돌아간 영문을 알 수 없었다는 장애인들도 수두룩했다.
조선시대가 배경인 좀비 드라마 <킹덤>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의 국내 최초 오리지널 드라마 <킹덤>은 청각장애인을 위한 자막에 시각장애인을 위한 한국어 화면해설까지 동시에 제공하고 있다. 서비스를 접한 시각장애인 남모씨는 “문화 충격을 느꼈다”고 말했다. 지상파 방송사들이 국내 통신업체와 손을 잡고 ‘토종 넷플릭스’를 만들겠다고 나선 상황에서 장애인 시청권을 위한 서비스도 넷플릭스 수준을 기대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넷플릭스를 마냥 칭송할 일도 아니다. 넷플릭스는 시청각장애인의 미디어 접근권 보장을 의무화한 미 연방시행령(CFR)에 따라 이러한 서비스를 제공한 것뿐이다. 해당 시행령은 미국에 수출되는 타 국가의 제품에도 장애인 방송 기능을 갖추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장애인의 권리를 보장하겠다는 미국의 강력한 의지가 규제로 작동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던 총리의 기자회견 모습 역시 장애인의 권리 보장에 대한 정부 의지가 만들어낸 결과에 가깝다. 뉴질랜드는 수어를 공식 언어 중 하나로 채택한 국가이고, 아던 총리는 ‘뉴질랜드 수화 주간’이 시작된 지난해 5월부터 공식 행사에 수어통역사를 대동하고 있다.
‘장애의 벽을 허무는 사람들’은 KBS 앞 기자회견에서 청와대가 운영하는 ‘청와대 뉴스룸’에도 수어통역이 없다고 지적했다. 청와대마저 법에 명시된 장애인의 권리를 무시했다. 한국이 세계 7번째로 ‘5030클럽’(인구 5000만명·1인당 GNI 3만달러 이상)에 가입했다는 소식으로 떠들썩하다. 선진국의 문턱에서 선진국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
<이유진 | 문화부 yjle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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