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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칼럼+옴부즈만

[문화비평]‘방송문화 창달’을 떠올리는 이유

김영찬 | 한국외대 교수·문화연구



지상파 방송사에 근무하는 지인 중에, 메일을 보낼 때마다 “방송문화 창달과 한국 방송 발전에 이바지하고자, 어쩌고저쩌고” 하며 1960~70년대풍의 상투적인 표현을 넉살좋게 건네는 분이 있다.

 

솔직히 ‘방송문화 창달’이란 말을 들을 때마다, 별로 듣고 싶지 않은 흘러간 옛 노래를 다시 들을 것을 강요당하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는 않지만, 몇 년 전까지 시사교양 PD로서 이 시대를 대표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내던 그분의 방송문화를 바로 세우고자 하는 진정성만은 인정하던 터였다.


그런데 ‘방송문화 창달’이라는 이 구투의 한물간 표어를 지금 이 시점에서 새삼스럽게 떠올리는 이유는 최근 우리 방송, 특히 지상파 방송사들이 보여주는 일련의 보도 행태와 프로그램 질의 저하가 심상치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즉 ‘방송문화 창달’과는 거리가 멀어도 아주 먼 행위들이 지난 몇 주 사이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는데, 이러다간 바람직한 방송문화가 자리 잡기는커녕 1990년대 이후 그나마 싹을 틔운 방송문화마저 실종되어 버리는 게 아닌가라는 심각한 우려가 든다. 


며칠 전 막을 내린 올림픽 중계방송의 경우 화면조작 논란, 선수들의 심리적·정신적·육체적 상태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무개념 인터뷰, 엉터리 자막, 한·일전 축구 소식 하나만으로 뉴스 시간 30분을 넘게 도배하는 두 공영방송의 메인 뉴스에 이르기까지 문제점을 지적하자면 끝이 없을 정도다.

 

걸그룹 티아라의 멤버 화영을 둘러싼 논란을 보도할 때에는 왕따라는 사회적 이슈와 접합시켜 보도하는 듯하면서 오히려 선정적인 시각에서 아이돌 산업을 둘러싼 문제들을 천박화시키는 놀라운 신공을 보여주더니, 하루아침에 ‘글로벌 오빠’로 떠오른 싸이의 ‘강남 스타일’에 대해서는 한류의 선봉, K팝의 승리 운운하며 “아 태극기 휘날려라~”식의 가슴 뜨거운 애국 마케팅 뉴스의 톤으로 또 하나의 성공 신화를 주조해 내기도 했다.

 


여수엑스포 특설무대에서 가수 싸이가 무대를 선보이고 있다 (출처: 경향DB)



물론 방송사들이 이렇게 스포츠와 연예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치중한 뉴스를 쏟아내는 와중에 정작 현 국면에서 폭발성을 지닐 수 있는 정치적·사회적 의제들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민간인 사찰의 배후나 주요 언론사의 파업 문제 등은 마치 오래전 구문인 듯 취급되는가 하면, 사회적 다양성을 담보하고 소수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데 앞장설 수 있는 대법관과 인권위원장의 임명 문제나 아직 끝나지 않은 용산참사에 대해서는 어떠한 새로운 문제 제기나 문제의식도 없어 보인다. 새누리당의 ‘공천 헌금’ 파문과 여야의 대통령 후보 선출, 경제민주화 등에 대한 보도도 스포츠·연예 뉴스에 비해 치열함과 깊이가 떨어지기는 마찬가지다.


위에서 거론한 올림픽 방송과 관련한 문제의 사례들 중 대부분은 주지하다시피 MBC에서 일어난 일로, 지난 1월에 시작해 170일간 계속된 파업의 여파가 얼마나 치명적일 수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파업의 근본적인 이유는 철저히 정치화된 사장 선임 방식 때문이라 할 수 있는데, 지금의 대통령, 여당, 야당의 나눠먹기식 추천 및 임명 방식을 탈피하는 혁신적인 개선안이 마련되지 않는 한, 집권당이 방송통신위원회는 물론 KBS 이사진과 방송문화진흥원 이사진에 대한 장악을 통해 사장을 임명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시도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말하자면 방통위·KBS·방문진·EBS 이사 및 사장 선임 방식의 혁신은 방송문화 창달을 위한 최소한의 제도적 조건인 셈이다.


그렇지만 사회 각계각층을 아우르는 중립적인 공영방송 사장 추천위원회 같은 새로운 제도가 가시화될 때까지는, 결국 이달에 임명된 두 공영방송사 이사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공영방송의 수장들이 제 역할을 못하고 정치 논리나 진영 논리에 휘둘릴 때, 공영방송이 본분을 망각하고 오히려 천박한 방송문화를 만들어내는 데 앞장설 때 이들에게 경고를 주고 감독을 해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바로 새로 임명된 이사들이다. 이들이 이 나라의 방송문화 창달을 위해 얼마나 헌신하고 제 역할을 해내는지 지켜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