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 공직자 중 많은 사람이 석연치 않은 이유로 병역을 이수하지 않았다. 이들의 아들들도 역시 석연치 않은 이유로 병역을 이수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이 선출되거나 임명될 때마다 병역 문제로 나라가 들썩인다. 그 꼴을 보다 못해 이런 발상까지 나왔다.
더럽고 추악한 속사정 모르는 바 아니고, 오죽하면 이런 방안까지 생각할까 이해도 하지만, 동의하기는 어렵다. 병역을 마치지 않은 남성은 선출 및 임명직을 포함하여 어떠한 공직에도 오를 수 없도록 하자는 발상은 한 줄 간단한 법도 될 수 없고, 쉬운 길도 아니다. 심지어 매우 위험하기조차 하다. 국가 사회의 구성원 일부를 공직(public official, 특히 government official) 일반에서 원천적으로 배제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병역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실종되거나 이를 뽑거나 무릎 인대를 찢거나 손가락을 자르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군대를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장애인들이 여기서 우리의 관심 대상이다. 병역을 이수하지 않으면 공직을 맡겨서는 안 된다는 발상은, 이런 장애인들로부터 공직을 담당할 권리를 박탈하는 부작용을 초래한다.
물론 장애인 같은 비자발적 병역 불이수자는 예외로 두면 될 것이다. 그러나 누가 이를 판단하는가. 공직자의 병역을 둘러싼 '불필요한 논란'의 핵심은 언제나 안 갔느냐, 못 갔느냐를 놓고 벌어져 왔으며, 갈 수 있는 사람이 안 갈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장애인을 가장하는 것, 즉 일시적이거나 의도적으로 장애인이 되는 것임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 게다가 100보 안 가고 50보만 간 '더럽고 추악한 사정'은 어쩌는가. 이를테면 의도적으로 현역을 가지 않고 옛날의 방위나 지금의 공익근무요원 등으로 병역을 마친 사람은? 5급 이상 공무원은 못하도록 하나?
예외를 두면 석연치 않은 면제 사유로 인한 논란은 다시 재연된다. 새로운 방안의 의미가 없다. 논란을 완전히 종식시키려면 예외를 두지 않아야 한다. 그러면 민주 사회의 기본 원칙을 훼손하는 폭압적 발상이 되고 만다.
사장님의 취향이 특이해서,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남성은 입사시키지 않는 사기업은 있을 수 있다. 공직이란 사회의 어떤 구성원도 원천 배제해서는 안 되는 영역이다. 장애를 가진 사람이 임명직은 물론이고 선출직조차 나서지 못하도록 공식으로 막아버리는 나라는 정상적인 민주 국가라 할 수 없다.
군대 갔다오면 오히려 차별 받았던 미국
미국 연방 정부나 주 정부 소속인 수많은 기관과 기구, 학교의 직원 모집 공고를 보면 거의 대부분 맨 끝에 이런 말이 달려 있다: 'AA/EOE'. 이렇게 풀어 쓴 공고도 있다: "OOOO is an Affirmative Action/Equal Opportunity Employer." 즉, 해당 기관은 소수자를 더 배려하는 어퍼머티브 액션을 준수하며, 개인의 조건에 따라 취업에 차별을 두지 않고 똑같은 기회를 주는 고용주라는 점을 명시한 것이다. 더 친절한 공고문은 이런 말을 덧붙이기도 한다: "Women, minorities, veterans, and individuals with disabilities are encouraged to apply."
이들이 착해서 그런가? 아니다. AA/EOE는 법으로 규정된 고용 원칙이다. '시민적 권리에 관한 법(Civil Rights Act)'을 비롯한 법령이 고용에서 차별을 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강제한다. 정부 고용주가 차별해서는 안 되는 개인의 조건은 무엇인가. 애초에는 인종, 피부색, 종교, 성별, 출신 국가 등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고려해야 할 조건들이 더 많아졌다. 그래서 연령, 장애, 성적 취향 등이 차별 금지 항목으로 추가되었다. 예컨대 '연령 차별 금지법'은 40세 이상의 구직자를 취업에서 차별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미국 구인 공고에서 'OOOO년 이후 출생자' 따위의 말을 보기 어려운 것은 이 때문이다. (물론 직무의 특성 때문에 특정한 장애를 가진 사람을 뽑지 않는 것은 인정된다.)
공직뿐 아니라 사기업 중에서도 AA/EOE를 따르는 기업이 적지 않다. 바비를 만드는 세계적인 완구 회사인 마텔(Mattel)의 다음과 같은 고지를 보면 눈물이 날 정도다:
모든 개인에게 동등한 취업 기회를 주는 것이 마텔의 방침이며, 인종, 피부색, 종교, 출신 국가, 조상, 사회적 배경, 나이, 결혼 여부, 전역자 여부, 장애 여부, 성별(임신, 출산, 기타 관련 의학적 상태 포함), 성적 취향, 성별 인식, 기타 연방법과 주법, 지방법이 규정하는 어떠한 사항으로도 채용에 차별을 두지 않습니다. (It is Mattel's Policy to afford equal employment opportunity to all individuals, regardless of race, color, religion, national origin, ancestry, social origin, age, marital status, veteran status, disability, sex (including pregnancy, childbirth or related medical conditions), sexual orientation, gender identity, or any other basis protected by federal, state or local law.)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한국은 공직자의 병역 논란이 신물이 날 정도로 반복되다 보니, 군대를 다녀 온 사람에게만 기회를 주자는 주장까지 등장했는데, 미국은 거꾸로 군대를 다녀 온 사람에게 불이익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법이 있다. 군대 경력을 놓고 접근 방향이 정반대인 셈이다. 1974년에 제정된 '베트남 참전용사 지원법'에서는 취업 지원자의 군대 경력을 이유로 취업에 차별을 두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군 복무 이후 정신적인 문제를 겪는 전역자들을 기피하는 채용 방침을 금하기 위한 조처였다.
공직을 비롯한 취업의 문은 최대한 공평하게 열려 있어야 한다. 개인이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조건 때문에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된다. 아버지를 잘 만나서 취직이 저절로 되는 것이 불공정한 것만큼이나, 군대에 가지 못하는 장애가 있다고 취업에 제한을 받는 것도 불공정한 일이다. 더구나 공직에서 말이다. 그럴 가능성이 생기는 방안은 결코 상식적이지도 민주적이지도 않다.
연예인도 군대 기피 논란의 단골 손님이다. '더럽고 추악한 속사정' 때문에 병역 이수자만 공직을 맡을 수 있도록 한다면, 연예인도 병역 이수자만 해야 할 게다. 문제의식에 공감은 하지만, 해결법으로서는 넌센스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병역을 둘러싼 비리가 발붙이지 못하도록 단속을 강화하고, 공직자로 나선 사람의 병역 의혹은 좀더 철저히 검증하여 응징하는 게 느리긴 해도 정도(正道)가 아닐까 싶다.
※ 이미지: 본문에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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