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T 모니터, 기억하십니까? 데스크탑 컴퓨터의 모니터를 LCD로 바꾼 뒤, 그 전에 쓰던 CRT 모니터는 책상 한 구석에 그냥 보관해 왔다. LCD가 이미 대세가 된 때라 누구 줄 수도 없었고, 갖다 버리려니 돈도 들고 귀찮기도 했다. 무엇보다, 멀쩡한 기계를 내다 버린다는 게 꺼림칙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CRT는 얼마나 크고 무거운가. 이 놈이 차지하는 공간이 적지 않았다. 얼마 전에 드디어 작심을 하고 CRT를 없애버리기로 했다. 찾아보니 다행히 중고물품 기부를 받는 곳에서 무료로 받아준다. 여기 가져갈까 하다가, 혹시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직접 전해 주는 게 낫겠다 싶었다. 상태도 좋고 흠이나 테이프 자국 하나 없이 새 것처럼 깨끗하니 찾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사진을 몇 장 찍어서, 크레이그 리스트의 'free' 페이지에 올려 두었다.
그 뒤 며칠 동안 내 이메일 계정은 이 모니터를 달라는 사람들의 이메일로 폭격을 맞았다. 세상에, 비록 공짜긴 하지만 구닥다리 CRT 모니터를 찾는 사람이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다. 어떤 사람은 당장 쫓아오겠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지금 여행중이니 돌아오자마자 찾아오겠다고 예약을 하고 싶다고 했다.
모니터는 광고를 낸 지 이틀 만에, 가장 먼저 연락을 해 온 사람이 와서 가져갔다. 의대생이었다. 말만 들어도 눈앞에 달러 표시($)가 빙빙 도는 의대생이 왜 구형 모니터를 챙겨 갈까. 궁금하긴 했지만, 공짜로 물건을 주고받는 과정은 최대한 간단하고 짧아야 하는 게 예의다.
며칠 뒤, 우연한 기회에 CRT 모니터에 대해서 다시 찾아 볼 일이 생겼다. 이를 통해서, 아주 당연하지만 내가 전혀 모르고 있던 사실을 하나 알 수 있었다. CRT 모니터의 수명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며, 여전히 CRT 모니터를 찾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일정한 직업 집단에서는 CRT를 아직도 주력 모니터로 쓰고 있다. 예를 들면 사진가들이다.
LCD 모니터는 성능이 많이 좋아져서 데드 픽셀 같은 것은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만, 아직도 색 왜곡 현상이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액정 모니터는 최고급은 아니지만 신뢰할 만한 회사의 제품인데도, 사진이 위에 있을 때와 아래 있을 때에 명암도에서 미세한 차이가 난다. 각도를 달리 해 보아도 마찬가지인 것으로 보아, 모니터 자체에서 나오는 현상으로 생각된다. 사무실에서 쓰는 듀얼 모니터는 두 개가 비슷한 시기에 제조된 같은 회사의 같은 모델인데도, 설정 수치를 똑같이 해 두어도 이미지가 다르게 나타난다.
이러한 상황은 정확하게 모니터 출력을 해야 하는 사람들, 이를테면 사진가나 컴퓨터 미술가에게는 치명적일 수도 있다. 그래서, 사진가들은 색 왜곡 현상이 비교적 덜한 CRT 모니터를 여전히 쓴다는 것이다. 물론 값비싼 모니터들은 이런 왜곡을 보정할 수 있겠지만, 그냥 CRT를 쓰는 편이 싸고 편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의대생이 중고 CRT를 가져간 것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나름의 필요가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세포를 염색해 놓고 들여다 보는데 색이 정확하지 않다면 낭패일 것이다. CRT가 더 정확할 텐데, 요즘은 새 것을 살 수도 없지 않은가. 그런 추정을 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나는, 혹시나 하고 크레이그 리스트의 '컴퓨터' 페이지에 가서 CRT로 검색을 해 보았다. 주르륵 뜬 구형 모니터들은 모두 몇십 달러에 판매되고 있었다. 공짜라고 내 놓았더니 이메일이 쇄도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아쉬웠던가? 아니다. 큼직한 모니터를 처분해 버려서 시원한 마음이 더 컸고, 무엇보다 나 역시 이 모니터를 공짜로 얻었던 것이다. 동료가 새 컴퓨터를 사면서 번들로 따라온 모니터를 내게 준 게 이 CRT였다. 공짜로 얻어서 잘 쓰고, 공짜로 보내 또 잘 쓰이게 됐으니 나로서는 아쉬울 게 없다. 게다가, 이제는 쓸모가 없어서 퇴물처럼 여겼던 제품들이 세상의 한 구석에서 여전히 꼭 필요한 존재로 사랑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보너스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완전히 멸종된 것처럼 인식되는 도트 프린터, 감열 프린터가 어떤 직업 세계에서는 여전히 잘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처럼.
그러나 CRT는 얼마나 크고 무거운가. 이 놈이 차지하는 공간이 적지 않았다. 얼마 전에 드디어 작심을 하고 CRT를 없애버리기로 했다. 찾아보니 다행히 중고물품 기부를 받는 곳에서 무료로 받아준다. 여기 가져갈까 하다가, 혹시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직접 전해 주는 게 낫겠다 싶었다. 상태도 좋고 흠이나 테이프 자국 하나 없이 새 것처럼 깨끗하니 찾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사진을 몇 장 찍어서, 크레이그 리스트의 'free' 페이지에 올려 두었다.
그 뒤 며칠 동안 내 이메일 계정은 이 모니터를 달라는 사람들의 이메일로 폭격을 맞았다. 세상에, 비록 공짜긴 하지만 구닥다리 CRT 모니터를 찾는 사람이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다. 어떤 사람은 당장 쫓아오겠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지금 여행중이니 돌아오자마자 찾아오겠다고 예약을 하고 싶다고 했다.
모니터는 광고를 낸 지 이틀 만에, 가장 먼저 연락을 해 온 사람이 와서 가져갔다. 의대생이었다. 말만 들어도 눈앞에 달러 표시($)가 빙빙 도는 의대생이 왜 구형 모니터를 챙겨 갈까. 궁금하긴 했지만, 공짜로 물건을 주고받는 과정은 최대한 간단하고 짧아야 하는 게 예의다.
며칠 뒤, 우연한 기회에 CRT 모니터에 대해서 다시 찾아 볼 일이 생겼다. 이를 통해서, 아주 당연하지만 내가 전혀 모르고 있던 사실을 하나 알 수 있었다. CRT 모니터의 수명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며, 여전히 CRT 모니터를 찾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일정한 직업 집단에서는 CRT를 아직도 주력 모니터로 쓰고 있다. 예를 들면 사진가들이다.
LCD 모니터는 성능이 많이 좋아져서 데드 픽셀 같은 것은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만, 아직도 색 왜곡 현상이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액정 모니터는 최고급은 아니지만 신뢰할 만한 회사의 제품인데도, 사진이 위에 있을 때와 아래 있을 때에 명암도에서 미세한 차이가 난다. 각도를 달리 해 보아도 마찬가지인 것으로 보아, 모니터 자체에서 나오는 현상으로 생각된다. 사무실에서 쓰는 듀얼 모니터는 두 개가 비슷한 시기에 제조된 같은 회사의 같은 모델인데도, 설정 수치를 똑같이 해 두어도 이미지가 다르게 나타난다.
이러한 상황은 정확하게 모니터 출력을 해야 하는 사람들, 이를테면 사진가나 컴퓨터 미술가에게는 치명적일 수도 있다. 그래서, 사진가들은 색 왜곡 현상이 비교적 덜한 CRT 모니터를 여전히 쓴다는 것이다. 물론 값비싼 모니터들은 이런 왜곡을 보정할 수 있겠지만, 그냥 CRT를 쓰는 편이 싸고 편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의대생이 중고 CRT를 가져간 것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나름의 필요가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세포를 염색해 놓고 들여다 보는데 색이 정확하지 않다면 낭패일 것이다. CRT가 더 정확할 텐데, 요즘은 새 것을 살 수도 없지 않은가. 그런 추정을 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나는, 혹시나 하고 크레이그 리스트의 '컴퓨터' 페이지에 가서 CRT로 검색을 해 보았다. 주르륵 뜬 구형 모니터들은 모두 몇십 달러에 판매되고 있었다. 공짜라고 내 놓았더니 이메일이 쇄도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아쉬웠던가? 아니다. 큼직한 모니터를 처분해 버려서 시원한 마음이 더 컸고, 무엇보다 나 역시 이 모니터를 공짜로 얻었던 것이다. 동료가 새 컴퓨터를 사면서 번들로 따라온 모니터를 내게 준 게 이 CRT였다. 공짜로 얻어서 잘 쓰고, 공짜로 보내 또 잘 쓰이게 됐으니 나로서는 아쉬울 게 없다. 게다가, 이제는 쓸모가 없어서 퇴물처럼 여겼던 제품들이 세상의 한 구석에서 여전히 꼭 필요한 존재로 사랑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보너스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완전히 멸종된 것처럼 인식되는 도트 프린터, 감열 프린터가 어떤 직업 세계에서는 여전히 잘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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