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아홉 살 켈리는 채식주의자다. 그녀뿐만 아니라 그녀의 가족이 모두 그렇다. 켈리의 가족은 채식주의자임을 자랑스러워 하며, 이런 자부심을 남에게 알리는 것은 그들의 즐거움 중 하나다. 최근 켈리 가족이 주목한 것은 자동차 번호판이었다. 번호판에 채식주의자임을 나타내는 말을 새긴다면 어떨까.
미국에서는 자동차 번호판의 기호(알파벳이나 숫자)를 자기가 지정할 수 있다(이른바 vanity plate). 물론 돈을 더 내야 한다. 따로 신청하지 않으면 주 정부가 정해주는 의미 없는 문자-숫자 조합이 배당되어 온다. 대부분이 이런 번호판을 달고 다닌다. 그러나 번호판에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을 위해서, 원하는 문구를 써서 추가 비용과 함께 내면 이를 번호판으로 찍어서 보내주는 제도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두 가지다. 하나는 자신이 원하는 메시지를 번호판에 새기려는 사람 쪽의 문제고, 다른 하나는 이를 발부해 주는 주 정부(정확히 말하면 교통국) 쪽의 문제다.
특별히 신청하는 번호판의 기호도 일반 번호판의 규격과 같아야 한다. 따라서 포함될 수 있는 숫자나 문자는 기껏해야 예닐곱 자다. 자신이 나타내고 싶은 메시지를 예닐곱 자로 표시해야 한다. 그러자니 머리를 써야 한다. 최대한 축약하면서도 남들이 보고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게 신청자 쪽의 고민이다. 그래서 TO는 2, FOR는 4, ARE는 R, YOU는 U 등의 상식적인 축약법이 활용된다. 또 모음은 대충 다 빠진다. school은 SKL, member는 MBR, power는 PWR 하는 식이다.
암호 풀기와 같은 신청 기호 심사 작업
켈리네 가족은 채식주의의 대표 음식으로 두부(tofu)를 생각해 냈다. 채식의 상징이면서도 보편적으로 사랑 받는 두부. 게다가 글자 수도 넉 자 밖에 안 된다. 켈리는 ILVTOFU (I Love Tofu)라는 기호를 번호판 신청서에 자랑스럽게 써 넣었다.
며칠 뒤에 주 정부로부터 연락이 왔다. 신청한 기호를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웬일인가 싶어 연락을 해 봤더니, 음란한 문구라서 등록을 할 수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교통국의 해석을 듣고 켈리는 기절초풍할 뻔했다. 교통국은 ILVTOFU를 'I love to fuck you'로 새긴 것이다. 신청 기호에 'FU'가 들어가면 거의 대부분 승인을 받지 못한다고 한다.
차량 소유자가 원하는 번호판 문구를 신청받기는 하지만, 신청 기호를 무조건 다 승인해 주지 않는다. 여러 가지 불건전한 은어나 약어를 노골적으로, 혹은 은밀하게 포함시킨 문구들이 수시로 신청서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게 교통국 쪽의 문제다. 번호판 신청 제도를 건전하게 쓰면 좋은데, 세상에는 별별 사람이 다 있게 마련이지 않은가. 번호판을 신청하는 사람들도 그렇다. 이들은 최대한 머리를 써서 '은밀하면서도 공공연하게' 작성된 기호를 신청서에 써낸다. 교통국은 신청된 기호 중에서 불건전한 것을 가려내어 탈락시켜야 하는데, 이게 마치 암호를 풀어야 하는 것처럼 골치 아픈 작업이다. 영어 음운론과 표기법에 대해서도 정통해야 하며, 속어나 은어는 물론이고 대중 문화나 트렌드도 잘 꿰고 있어야 실수하지 않고 걸러낼 수 있다.
미국 많은 주는 내부적으로 금지어 리스트를 만들어서, 이런 금지어가 포함되거나 이렇게 해석될 수 있는 경우 허가를 내주지 않는다. 금지어 목록은 개인이 아닌 위원회가 주기적으로 수정하고 업데이트한다.
금지되는 말들은 음란, 폭력, 마약, 종교, 성, 인종 등과 관련된 단어, 다른 사람을 폄하하거나 자극할 수 있는 단어, 갱들의 은어, 욕설 등이다. 켈리가 사는 콜로라도의 주 교통국은 200개 이상의 금칙어가 규정된 목록을 갖고 있다. 1천600개 정도의 금지 기호를 규정하고 있는 오하이오의 예(pdf, 아래 그림)를 보면 교통국 관계자의 고민을 짐작할 수 있다. 어떤 주에서는 이런 단어들을 조합한 금지 문구가 7천 개에 이른다고 한다.
아시다시피 미국은 표현의 자유를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인정하는 나라다. 번호판에 자신이 원하는 메시지를 새기고 싶어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 영역에 포함되지 않는가? 정부의 규제는 어떻게 합리화할 수 있는가?
지난 2월에 번호판을 신청했다가 퇴짜를 맞은 대학생 킴멜이 가진 의문도 이런 것이었다. 그는 'IM GAY'라는 문구를 신청했으나, 오클라호마 주 정부로부터 '다른 사람들을 자극할 수 있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킴멜은 동성애자이며, 이런 사실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표현하는 메시지를 번호판에 새기는 것은 자신의 자유이며, 정부가 이를 규제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멍청함을 알리고 싶다면 그렇게 하게 내버려 두라"
그러나 표현의 자유가 중요하더라도, 좀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우선 번호판의 메시지는 너무 간략하고 단절적이다. 메시지라고 하기에도 불충분하다. 따라서, 공공 영역에서 토론을 촉진하고 아이디어의 교류를 확장하는 데 기여하는 부분이 극히 적다.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자동차 번호판은 정부의 공식 문서다. 정부 문서에 FUCK, DAMN, SHIT 따위를 아무렇게나 써 넣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러한 주장은, 자동차 소유주가 차를 통해 정말 뭔가를 말하고 싶다면 번호판이 아니더라도 각종 스티커를 붙일 수 있다는 사실로서 합리화된다. 자기 차에라면 현직 대통령을 욕하는 스티커를 붙이고 다녀도 정부로부터 아무런 규제를 받지 않는다. '부시를 탄핵하라' '오바마에게 저주를' 같은 범퍼 스티커는 일찌기 큰 인기를 얻은 바 있다. 자동차 뒷면이 온갖 메시지 스티커로 가득 찬, 할 말 무지하게 많은 자동차도 드물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정도가 지나쳐서 안전 운행을 방해할 정도면 문제가 되겠지만, 대개는 아무런 문제 없이 다닐 수 있다. 물론 'I Love Tofu'나 'I'm Gay'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일각에서는 표현의 자유의 측면 아니라 '세수의 증가' 측면에서 그냥 원하는 대로 다 줘버리라는 주장도 편다. 굳이 자기 돈을 더 써가면서까지 자신의 멍청함을 공공연히 증명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고, 우리는 그들이 치르는 멍청함의 대가로 길이나 열심히 닦자는 것이다. 켈리나 킴멜의 경우를 이렇게 볼 수는 없지만, RDNECK, JCKASS, MADDOG, IMNAKED, HARDICK, ORGA5M, LUVBJS 같이 대책없는 번호판들을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예닐곱 자 밖에 안 들어가는 번호판에도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자, 그럼 다음의 기호들은 어떤 뜻인지 짐작하시겠습니까? 모두 금지되어 있는 번호판 기호입니다: MANWTF, IH8PPL, ENDGOVT, DAMIML8, ILUV269, IH8MSFT, MSTRB8S.
※ 번호판 사진: http://www.flickr.com/photos/malingering/97038512/, 오하이오 번호판 리스트(일부): 본문에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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