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 말기에 사나워지는 짐승이 있다. 언론이다. 단임제 대통령제하에서 정권 말기가 되면 아무래도 정부의 통제력이 떨어지기 마련인데, 우리 언론은 이 시기를 놓치지 않는다. 보수·진보 할 것 없이 사납게 대통령 측근의 비리를 캐고 정권을 직접 공격한다. 1987년 제6공화국이 출범한 이후 정권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반복해서 나타난 패턴이다.
패턴 속에서 떠오르는 공식이 하나 있다. 정권 재창출에 성공한 정부는 그나마 창피를 당하는 정도로 넘어가지만, 그렇지 못하면 파국적인 결말을 맞는다. 참혹한 처지에 놓이기도 한다. 정권 재창출이 불가능할 정도로 타락한 정권이어서 언론이 사나워지는 건지, 사나워진 언론 때문에 위기에 처한 정권이 재집권에 실패하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를 ‘파국적 정권교체의 공식’이라 부르기로 하자. 이 공식이 작동하는 한, 제6공화국을 과연 강건한 민주주의 공화국이라 부를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이념과 정책에 따른 정권교체라고 하기에는 그 이행의 방식이 너무 파괴적인 양식을 따르기 때문이다.
공화국의 주권자인 국민은 이 공식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았다. ‘파국적 정권교체’란 개별 정권의 실패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 민주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형성하는 데 동참한 유권자로서는 그들의 의지가 사후적으로 부정되는 일을 겪는 일이기도 하다.
주권자는 또한 언론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게 됐다. 언론은 여론을 형성하고, 여론에 기초한 민주적 권력을 창출하는 데 기여하기도 하지만, 그 권력의 정당성을 허물어 버리기도 한다. 언론은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정부를 국민적 분노와 수치심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몰아치기 능력을 갖고 있다. 언제까지나 ‘우리 편’인 주류 언론은 없다.
제6공화국에서 7번의 정부형성과 3번의 정권교체를 겪은 우리 국민은 정부와 언론, 그리고 공화국의 역사에 대해 양가적 감정을 갖고 있다. 자신의 투표로 형성한 자랑스러운 정부가 비참한 파국을 당했던 일을 겪지 않았던 유권자가 별로 없다. 자신이 믿고 선출했던 정치인이 언론의 조리돌림을 당하는 일을 목격하지 않았던 유권자도 거의 없다.
따라서 주권자가 언론에 대해 공공연하게 의심하고 비판하는 자세를 취한다고 해서 놀라지 말자. 언론의 정보취득 및 가공 능력을 의심한다거나, 해석적 권위에 도전한다거나, 심지어 스스로 새로운 언론이라 자임하며 나선다고 해서 놀라지 말자. 언론이 강력한 이 나라에서 수차례 정권교체를 겪은 국민이 스스로를 가르쳐 터득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심지어 새롭게 등장한 사람들도 아니다.
나는 2002년 대통령 선거와 2004년 총선을 관찰하면서, 주류언론의 보도에 공공연히 비판적이며, 정치적 담론 전문가에 대항하는 해석을 제시하는 새로운 인터넷 담론공중이 등장했다고 보고한 바 있다. 이른바 ‘비판적 담론공중’이다. 인터넷 담론 공간에서 정치사회적 사안에 대해 활발하게 토론했던 이들은 언론의 공정성을 문제 삼으며 주류 언론에 저항하는 담론 생산자로 등장했다.
2017년 비판적 담론공중은 수적으로 더 많아졌다. 그리고 강해졌다. 언론보도의 사실성을 별도로 확인하고, 언론인의 해석에 저항하는 주장도 더 당당하게 편다. 이념적으로도 좌우를 넘어서 다양해졌다. 여성주의, 환경주의, 자유방임주의, 민족지상주의, 반공주의 그리고 이름을 따로 붙이기 민망한 주의자들과 이 모든 집단의 극렬한 변종들도 포함한다.
담론윤리적 관점에서 볼 때, 이들이 공정한 담론의 규칙을 따르는지 여부가 관건이 된다. 나는 2000년대 초 비판적 담론공중이 즉각적이고 부정적인 반응에 매몰되어 공정한 담론규범을 창출하지 못했다고 평가한 적 있다. 15년이 지난 지금 이들은 얼마나 달라졌는가. 내가 보기에는 아쉽게도 이들은 방향은 제대로 잡았지만 아직도 진화 중이다. 공정한 담론의 규칙을 주장하고 있지만, 그 규칙을 자신의 담론행위에 적용하지는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비판적 담론공중은 ‘가짜뉴스’를 경계하며 거짓 정보를 제공하는 자를 가혹하게 처벌할 것을 주장하지만, 실은 그들이 불완전한 정보의 생산자요 중계자 역할에 열심이라는 사실에 눈감는다. 이들은 또한 사실 주장이라고 해서 저절로 옳은 주장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팩트폭력’을 찬양하고 그 일에 몰두한다. 무엇보다 이들은 다른 누구의 ‘지적질’ ‘훈장질’ ‘꼰대짓’을 참지 못하면서, 실은 자신도 그 일에 동참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조금이라도 배우고 있다는 점을 잊는다.
이 때문에 그런가 그들은, 아니 우리는 자신에 대해 알 수 없는 피로감을 경험하고 있다. 우리는 정권 말기에 사나워지는 짐승을 경계하면서 스스로 사나워지고 있다. 우리는 ‘파국적 정권교체의 공식’에서 빠져나오기를 원하지만, 과연 언제 그럴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준웅 |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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