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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뉴스

[미디어 세상]제대로 쓴 사망기사를 보고 싶다

한 좌파 정치인이 타계했다. 현대사 전공자인 한 칼럼니스트는 그날로 3700단어 분량의 사망기사를 가디언 지면에 실었다. 한글로 번역하면 원고지로 약 60장에 달하는 분량이다. 같은 날 런던타임스도 3700단어로 썼고, 좌파 정치인과 수십년 치고받고 싸워온 보수일간지 텔레그래프는 2700단어 규모의 사망기사를 냈다.

 

영국 노동당 좌파의 전설이 된 토니 벤을 기린 사망기사를 읽어 보자. 젊어서 진보적이었다가 늙으며 우경화했던 무수한 좌파 정치인들과 달리, 그는 나이 들면서 더욱 개혁적으로 변했다. 그는 보수당 의원은 물론 왕당파, 산업지도자, 금융자본, 국제주의자, 그리고 동료 좌파로부터도 위험하다고 비난받았다. 그러나 벤은 주민의 도움을 받아 법을 바꿔서 귀족 작위를 포기하고 지역구 의원직을 되찾은 인물이며, 50년이나 지켜온 의회를 떠나면서 “정치에 전념하기 위해” 의원직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인물이었다.

 

사망기사는 벤의 출신, 교육, 가족, 친구와 적을 재료로 삼는다. 이들을 그의 유별난 정치적 역정에 엮어 이야기로 담아내고, 공과를 평가했다. 예컨대, 가디언의 사망기사는 그의 개혁정책이 실패했기에 망정이지 성공했더라면 대처의 보수노선에 더 큰 도움을 줄 뻔했다고 평가했다. 말년에 그는 대중시위의 최전선에서 시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는데, 이로써 그는 결국 적들로부터도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이는 보수와 진보 언론이 함께 인정한 바다.

 

여기 한 진보 정치인이 타계했다. 시민들의 애도와 추념이 넘치는 가운데 함께 슬퍼하고 분노하는 기사들이 많다. 그러나 차분하게 망자의 기록을 담은 기사는 별로 없다. 사망 사실은 있는데 경위가 모호하다. 사망을 계기로 삼아 정치자금법 개선을 논한 평론은 있지만 사망한 정치인의 자금운용 사실을 검토한 기사는 없다. 사설까지 낸 언론사도 있다. 그러나 애도가 지나쳐서 그런가 제대로 된 사망기사가 없다. 삶의 무게에 값하는 내용을 담은 글 말이다.

 

급작스러운 죽음이라서 그랬을까? 미국 연방대법원 스칼리아 판사는 2016년 2월13일 토요일 아침에 텍사스 리조트에서 급사한 채 발견됐다. 뉴욕타임스 법조기자 애덤 립택은 같은 날 4700단어로 사망기사를 냈다. 원고지 약 75장에 달하는 소논문 규모의 기사다. 기사는 스칼리아 판사의 가족사, 경력, 평판은 물론 그의 판결, 법학 이론과 방법론, 그리고 그가 미국 헌법 해석에 남긴 자취와 영향을 꼼꼼하게 다루었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기사를 낼 수 있나? 미리 써 놓고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립택 기자는 선배 법조기자인 앤서니 루이스의 사망기사도 썼는데, 사망 소식을 듣자마자 몇 년 전 작성해 둔 기사를 디지털로 내보냈고, 인쇄본에 고쳐 싣기 위해 즉시 퇴고를 시작했다고 한다. 이 기사를 나중에 개고해서 미주리 법학 학술지에 논문으로 싣기도 했다.

 

때로 미리 써둔 사망기사가 기자보다 오래 살아남아 그를 추억한다. 2011년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79세로 타계했을 때, 뉴욕타임스 멜 구소 기자는 4000단어 분량으로 사망기사를 냈다. 그러나 구소 기자는 여배우보다 6년 전에 죽은 인물이었다. 구소 기자가 미리 써둔 사망기사가 너무 훌륭했기에 뉴욕타임스 사망기사 편집장은 그 기사를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요즘 인물의 죽음이 새 출입처가 된다는 듯 사망기사 쓰기를 강화하고 있다. 1851년 이래 뉴욕타임스가 간과했던 여성, 유색인, 숨은 영웅들에 대한 사망기사를 ‘놓칠 수 없는 죽음’이란 연재물로 내놓는다. 이 때문에 지난 3월28일 유관순 열사가 순국 98년 만에 뉴욕타임스에 사망기사가 실렸다. 900낱말로 이루어진 이 기사는 일본 제국주의에 죽음으로 저항했던 삶을 기술하고 한 일본 정치인의 반성도 함께 기록으로 남긴다.

 

기자란 결국 죽음을 쓰는 자다. 타인의 삶을 저울질하는 자란 뜻이다. 영미권에서 이름을 날린 기자 중에 초짜 시절을 회상하며 사망기사를 고쳐 썼다고 고백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역사적 사실들을 엮어서 이야기로 만드는 법을 배우는 데 사망기사 쓰기만 한 것이 없다. 한 분야에서 전문성을 쌓고 필명을 얻은 기자란 해당 분야 주요 취재원에 대한 사망기사를 미리 써서 편집자에게 맡겨 놓을 수 있는 기자임을 뜻한다.

 

나는 문득 우리나라에 왜 소위 ‘인물’이 없는지, 혹은 왜 없어 보이는지, 그 까닭을 생각해 본다. 혹시 죽음에 대해 소홀히 쓰기 때문이 아닐까. 인물이 될 만한 이의 삶을 미리 검토해서 기록으로 남겨 놓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당신이 다선 국회의원이라고 생각해 보자. 당신의 사망기사를 미리 써둔 정치부 기자 앞에서 뻔뻔스럽게 정치적 신조를 뒤집는 행동을 하기 어렵다. 당신이 대법원 판사라고 생각해 보자. 당신의 사망기사를 미리 써둔 법조기자 앞에서 재판거래 이야기를 하기 어렵다. 꼼꼼하게 관찰하고 맹렬하게 쓰는 자들 앞에서 ‘이야기가 안 되는 삶’을 살기 어렵다.

 

<이준웅 | 서울대 교수·언론정보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