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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뉴스

[미디어 세상]손바닥 위에 ‘장터’ 열리다

“여름 장이란 애시당초에 글러서, 해는 아직 중천에 있건만 장판은 벌써 쓸쓸하고 더운 햇발이 벌여놓은 전 휘장 밑으로 등줄기를 훅훅 볶는다.” 허생원과 그의 동업자 조선달이 매상을 많이 올리지 못해 서운해진 봉평장 하루의 마무리는, 섭씨 40도에 육박하는 요즘 날씨와 팍팍해진 경기에 울상이 된 우리네 마음과 오버랩됩니다.

 

물산이 적고 살고 있는 호수가 작아 규모가 나오지 않는 마을엔 3일, 5일 혹은 10일마다 장이 열렸습니다. 이스탄불의 그랜드 바자르처럼 언제나 사람들이 집결되는 곳은 정보가 모이고 퍼져나가는 허브의 역할을 합니다. 사람들이 모인 곳은 모인 사람의 수의 제곱에 해당하는 교류의 가치를 가진다는 멧칼프의 법칙은,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에서 최대한의 효과로 구현되는 걸 뛰어넘어 그야말로 전 지구적인 연결이 가능해진 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서 엄청난 규모의 시장으로 현실화되었습니다.

 

전통적으로 미디어를 유지하기 위한 재원은 직접 무엇을 판매하는 것이 아닌 ‘광고’라는 간접적 형식의 상행위로 조달되었습니다. “전하는 말씀 듣겠습니다”라는 익숙한 멘트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콘텐츠와 광고의 경계를 만들어 주었지요. 광고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최악의 발명품이 무선 TV 리모컨이라는 농담이 있었습니다. 어릴 적 아버지가 월부로 사오신 TV에는 채널 변경이 로터리식 스위치로 되어있었기에 “채널이 돌아간다”는 표현은 지금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회전식 문자판을 가진 구형 전화기로 통화를 하던 세대는 “다이얼을 돌린다”라는 표현을 남겨주었고요. 그 시절 채널을 돌리기 위해서는 TV로까지 몸을 움직여야 했기에 그 불편함 때문에라도 광고를 봤는데, 리모컨이 보급되자 손가락 버튼 하나로 채널이 바뀌는 마법은 광고인들에게는 천적과 같았던 것입니다.

 

광고라는 매개로 적절히 거리를 두며 공존하던 상행위와 방송 콘텐츠가 본격적으로 결합한 것이 물건을 전문적으로 파는 홈쇼핑 채널입니다. 물건을 파는 행위를 방송의 콘텐츠로 만들어 직접적인 상행위로 미디어가 사용된 것인데 각 채널은 국가로부터 ‘허가’되었습니다. 유통 방법이 마땅치 않아 판로가 어려운 기업들을 위해 소비자와 익숙한 TV 화면을 통해 만나도록 해 준 홈쇼핑 채널의 상권보호를 위해서 그 수가 제한된 것이죠. 목 좋은 곳을 선점하는 것처럼 리모컨을 이리저리 ‘돌리다’ 걸리게 한 채널의 배열도 무시 못할 특권이었습니다. 홈쇼핑의 주문은 전화로 가능했기에 상담직원을 수천명 고용해서 판매했고, 장사가 잘되어 상담과 통화의 시간이 길어지자 자동주문 ARS 시스템을 준비해 간단히 구매할 수 있게 배려했습니다. 시간을 파는 장사이다 보니 방송 시간과 매출이 비례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 온라인 비중을 높이려 해서 기존의 온라인 사업자와 경쟁하기 위해 투자했지만 그들과의 경쟁이 쉬운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이제 지하철에서도 사람들은 손바닥 위 콘텐츠를 봅니다. 다만 그 콘텐츠가 ‘현재 방송되고 있는 방송국의 콘텐츠’를 보는 것인지, ‘이미 방송된 방송국의 콘텐츠’를 보는 것인지, 아니면 ‘방송국의 콘텐츠가 아닌 지금 방송되는 콘텐츠’를 보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방송국의 콘텐츠가 아닌 이미 방송된 콘텐츠’를 보는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이 글을 쓰다 보니 대전 사람들만 이해한다는, 나란히 서있는 버스 정거장들인 ‘서대전역네거리’ ‘서대전네거리’ ‘서대전네거리역’이라는 명칭이 떠오르는군요.) 다시 말해 더 이상 콘텐츠를 만드는 능력과 전달하는 권력이 전통적 ‘방송국’에만 전유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정보의 접근 방식에 변화가 일어나자 이제는 거꾸로 온라인 쇼핑몰들이 쉽게 인터넷상에서 스트리밍 방송을 시작합니다. 동영상을 만드는 일을 하던 업체가 직접 홍보물을 만들고 패키징해서 상품 브랜드를 만들고 직접 유통하는 사례들도 나오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홈쇼핑 채널의 개수를 한정한 ‘허가’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최근에는 중국에서 수백만의 팔로워를 가진 ‘왕훙’이라 불리는 인터넷 스타들이 우리나라에서도 라이브 방송을 합니다. 면세점이나 쇼핑센터에서 자신의 팬들을 대상으로 제품을 소개하는 일이 늘고 있는데 한 백화점은 이들을 위한 스튜디오까지 만들었다 하네요. 스마트폰 하나로 자신의 팬으로 이미 확보된 시청자를 대상으로 현장에서 방송을 해내는 개인 크리에이터와 비교하여 편성과 콘텐츠 제작을 위해 많은 물량의 투자를 해야 하는 기존의 홈쇼핑 채널은 그 경쟁이 버거울 수밖에 없습니다. 몸이 가벼운 쪽이 훨씬 유리한 터이니까요.

 

작은 고을 5일장의 한 자리를 차지한 보부상이 수십명의 동네 사람에게 물건을 팔던 때가 불과 100년도 되지 않았는데, 이제 바다 건너 수십만명이 이 땅 어느 곳에서든 한 사람의 손바닥 위에 열린 장터에 방문하는 세상이 왔습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사실 하나는 파는 물건보다 그 물건을 파는 사람의 신용에 수많은 고객들이 지갑을 연다는 한결같은 진리입니다.

 

<송길영 | 마인드 마이너(Mind Min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