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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칼럼+옴부즈만

[미디어 세상]징벌을 더하는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강화할 수 없다

우리는 말의 효력에 민감한 사람들이다. 말이 씨가 되고, 말 한마디로 천 냥 빚도 갚는다고 한다. 심지어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 그래서 그런지 말하기에 대한 경계가 지엄하다. 발언의 효력을 알기에 엄하게 통제해야 한다고 믿는 듯하다.

말하기에 대한 경계는 민주공화국에도 이어진다. 우리나라는 진실을 말해도 명예훼손으로 처벌하는 형법을 가진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민주정이다. 개인에 대한 모욕에도 국가가 개입해서 처벌한다. 선거기간 중 공연히 사실을 적시하여 후보자나 그의 가족을 비방하는 경우에도 처벌한다.

 

발언에 대한 형사처벌 범위가 넓은 것도 문제지만, 발언의 해악을 따져 범죄로 볼 것인지 결정하는 법리가 당혹스러울 정도로 혼잡하고 모호하다. 개인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형법상의 명예훼손 법리를 적용하고, 사회적 평판을 보호한다면서 사실상 개인의 모욕감정을 문제 삼는다. 선거기간 중 공직후보자에 대한 의혹제기 보도만으로도 비방죄로 처벌받을 수 있다. 실제 형사재판에서는 발언자가 공익을 위해 발언한 것인지, 그리고 발언자가 진실이라고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지를 집중적으로 따진다. 그러나 공익과 상당성을 판단한 결과를 보면 일관성이 없다.

 

발언 규제에 대한 비일관성과 혼란을 노려서 언론을 상대로 송사를 벌이는 일이 많은 것도 문제다. 예컨대, 한 시민단체가 정파적 언론을 상대로 공직자 명예훼손을 이유로 형사고발하면, 당사자인 공직자가 처벌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히지 않는 한, 검찰이 기소의 칼자루를 쥐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형사소송은 그 자체가 새로운 정쟁의 대상이 된다.

 

결국 명예훼손, 모욕, 후보비방 등을 규정한 법률에 대한 위헌성 시비가 끊이지 않는다. 이런 조항들이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기보다 정치적으로 남용되는 현실을 개탄하는 이들이 많다. 유엔 인권위원회는 2015년 12월 ‘대한민국 제4차 정기보고서 최종견해’를 통해 우리나라에서 명예훼손을 비범죄할 것을 권고했다. 2019년 대한변호사협회가 주최한 심포지엄에서도 진실을 말하는 발언에 대한 처벌을 폐지해야 한다는 제언들이 이어졌다. 

 

이런 맥락에서 언론보도로 인한 피해구제를 넘어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은 뜬금없다. 언론중재 등 대안적 피해구제 제도가 엄연하고, 명예훼손 등 형사처벌이 가능하고, 또한 정치적 발언에 대한 형사소송이 정쟁의 도구로 남용되는 현실에서, 민사소송으로 언론사를 ‘징벌’하는 정책을 도입하겠다니. 특히 언론의 자유와 같은 정치적 기본권을 제한하는 정책을 도입하는데, 상법을 개정하는 과정에 끼워 넣는 방식으로 제도를 도입한다는 소식에 어안이 벙벙하다.

 

나는 기업의 부주의나 악의로 다수의 피해자가 발생했을 때, 개별적으로 피해구제를 받기 어려운 다수가 집단소송을 결행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또한 과도한 지배력을 근거로 불법행위를 자행한 사업자를 시민배심원의 권능으로 징벌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언론보도를 규제하기 위해 이미 존재하는 광범위한 형사처벌 규정을 그대로 두고, 새롭게 민사적 징벌제도를 도입하는 일은 억압적인 처사다.

 

우리 공화국은 발언의 자유와 집회 및 시위의 자유를 실천한 6월 항쟁을 통해서 등장했다. 이후에도 시민이 주도적으로 정치적 자유권을 확대함으로써 민주주의 공고화에 성공하고 있다. 권력의 타락을 고발한 언론과 그것을 지지한 시민의 자유권 행사 없이 2016년 대통령 탄핵은 불가능했다. 이런 나라에서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는 기존 제도는 그대로 둔 채, 새로운 정파적 소모전의 전쟁터가 될 것이 명백한 민사적 손해배상 제도를 도입하겠다는 의도를 이해하기 어렵다. 억압적인 수단을 동원해서 민주주의를 강화할 수 없다.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