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차 불편한 일이 많다. 문제는 그냥 불편해서 시비하는 정도가 아니라는 데 있다. 패륜이요, 차별이요, 존엄에 대한 도전이라서 참을 수 없다고 한다. 아무리 옷차림에 불과하고, 비유적 용어사용이라고 해도 그렇다. 용서할 수 없단다. 하지장애인에 대한 비유적 용어사용을 비판하며 시작된 쟁론 속에서 애초의 비유가 겨냥했던 정책적 발언의 요점은 사라져 버렸다.
우리 사회가 갑자기 도덕과 윤리의 체험학습장이 된 듯하다. 학습장에서 나누어준 교재는 소용없고, 학습장에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뭔가 배우는 그런 체험학습장 말이다. 몰랐다면 배우고, 배운 자들이 함께 앎의 기쁨을 나누면 그만일 텐데, 진짜 시비는 배운 뒤에 발생한다. 그걸 차별이요, 도전이요, 비하라고 하다니, 그렇다면 도대체 차별이란 뭔지, 도전이 뭔지, 비하가 뭔지 따져 보자고 덤빈다.
누구나 의견은 있기 마련이며, 나도 그렇다. 나는 때로 이쪽을 보고 ‘그런 것까지 시비를 걸면, 불편해서 어떻게 살겠어’라고 말하다가, 저쪽에 대해서 ‘이 무심한 척 잔인한 차별주의자들아’라고 외친다. 따라서 나는 지금 누구나 나름대로 갖고 있는 도덕적 가치와 판단을 문제 삼고자 하는 게 아니다. 누구나 누려야 마땅한 도덕적 감정을 표출할 수 있는 발언의 권리를 문제 삼는 것도 아니다. 내가 걱정하는 바는 우리가 동료 시민에 대해 서로 불편함을 말하는 빈도가 잦아지는 정도를 넘어서, 도저히 상대방을 참지 못하겠다는 식으로 행동하는 일이 발생하는 세태다.
관찰해 보면, 어떤 사람들은 전통과 질서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오래된 관습에 이유 없이 도전하는 일이나, 이미 정립된 가치를 교란하는 행동에 불편해한다. 그게 비록 옷차림에 불과하더라도 말이다. 다른 사람들은 돌봄과 공정함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약자에 대해 잔인하게 구는 행동이나 권력을 남용하는 일을 보고 참지 못한다. 무심한 발언 끝에 나온 표현에 불과하더라도 말이다. 요컨대 사람마다 불편한 대상이 다르고, 참지 못하는 이유도 다르다.
우리가 돌봄이니, 공정이니, 전통이니, 질서니 하며 지칭하는 가치는 말뿐인 게 아니다. 어떤 학자는 이를 묶어서 ‘도덕기반’이라 부르고, 다른 학자는 ‘도덕적 동기’라 부르지만, 용어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점은 이런 가치들은 인류가 오랫동안 공동체를 유지하여 생존하면서 세대를 거쳐서 다듬어 낸 ‘생각을 만들어 내는 틀’처럼 작동한다는 데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생각 속에는 개인의 취향, 도덕적 판단, 그리고 정치적 이념도 포함된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돌봄과 공정의 가치에 민감한 시민들이 정치적으로 진보적 성향을 보인다고 한다. 대조적으로 전통과 질서에 대한 도전을 참지 못하는 시민들은 보수적이 된다고 한다. 정치적 진보와 보수는 그저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고, 어떤 동네에서 자랐고, 어떤 열망을 갖느냐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만이 아니다. 도덕기반이 배움의 길을 트고, 계층적 감수성을 조절하고, 개인의 열망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도덕기반이 이런 것이라면, 그래서 그 때문에 생활 속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바는 물론 정치적 이념까지도 달라지는 것이라면, 우리는 입장이 다른 타인의 정치적 성향과 도덕적 판단에 대해 너그럽게 생각해야 마땅하다. 내가 불편하게 느끼는 지점을 타인은 느끼지 못하고, 타인이 용서할 수 없는 일을 나는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야 한다. 또한 우리는 타인이 미처 중요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도덕기반이 있다는 점을 일깨울 수는 있을지언정, 이미 작동하고 있는 타인의 도덕기반을 가르쳐 바꾸기는 어렵다는 점도 깨달아야 한다. 내가 느끼는 도덕적 우월감이 다른 시민을 설득할 수 있는 어떤 이유도 될 수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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