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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뉴스

[미디어 세상]“닥쳐 이 고라니 새끼야”

지금 욕 잘하는 동화작가가 인기다.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 속 설정이고 배우의 연기일 뿐이지만, 젊은 여류작가가 누구를 상대하더라도 기죽지 않고 거침없이 말하는 모습이 시원하다. 찰진 욕설을 예사로 내뱉고, 적절한 시점에 목소리를 깔고 능숙하게 말로 맞받아친다. 예컨대, 꾸짖듯 노려보는 상대를 보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한다. “알았어, 알았어, 눈으로 씹어 먹겠네 아주.”

 

 ‘젊은 여류작가’의 험한 말을 듣다 보면, 이게 뭐라고 그렇게 재미있게 들리는지 이유가 궁금해진다. 그건 아마도 ‘늙은 남류’(없는 말이지만 대조를 위해 사용해 보자) 고위공직자의 순한 말에 우리가 쉽게 감동하는 이유와 같을 것이다. 권력과 말하기 규범 사이에 뭔가 수상한 관계가 있다.

 

일반적으로 말은 권력에 수반한다. 때로 권력을 돕기도 한다. 정교하고 간교한 권력이 작동하는 곳에 세련된 말의 규칙이 작동한다. 이 사회에는 반말과 존댓말의 구분이 지엄하고, 은어와 비속어가 다양하고, 문어와 구어 간 구분이 엄격하다. 입사 기수를 따져서 선후배를 정하고, 연령을 달수로 따져서 형과 아우를 정해야 하는 까닭이 있다. 피차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되는 처지는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이 사회는 특별히 ‘세 치 혀가 사람 잡는다’는 곳이다. 이렇듯 지엄한 말하기 규범이 권력에 따라 비대칭적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이 이 규범의 잔혹함을 폭로한다. 여당 대표가 기자에게 욕설을 하고, 국회 법사위원장이 동료 의원에게 폭언해도 나중에 사과하면 그만이다. 어린 여자 연예인이 같은 말을 방송에서 했다면 어땠을까. 젊은 남자 교수라도 마찬가지다. 상대적인 권력과 권위에 따라 규범을 적용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당연하게도 평등한 관계에서 존댓말과 반말 간의 구분은 없어지는 경향이 있다. 시민혁명에 성공한 프랑스의 귀족과 평민은 혁명 동지들을 ‘당신’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하다는 듯이 ‘너’라 칭했다고 한다. 하느님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고 믿는 퀘어커 교도들은 부자간이라도 상대를 이름으로 부른다. 서로를 존대하는 귀족들도 위태로운 탐험대의 구성원이 되면 서로를 형제처럼 대우한다고 한다.

 

책으로 세상의 이치를 배우던 젊은 시절에 나는 기형적으로 발달한 우리 사회의 존비법이 억압적이라 믿었다. 그래서 우리말을 비하하고 외래어를 존귀하다고 여겼다. 문어와 구어 간에 괴리를 방치하는 말하기 문화도 문제지만, 과도하게 발달한 존비법이 문제라고 비판하고 다녔다. 이 비판을 듣고 있던 한 지혜로운 선배 교수가 이렇게 조언했다. 선택적으로 존경을 표시하는 행위가 문제가 아니라, 차별적으로 비하하는 태도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회가 문제가 아니겠나.

 

과연 그렇다. 존댓말과 반말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말하기 규범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런 규범을 악착같이 차별적으로 적용하는 우리 현실이 문제다. 땀 흘려 얻은 지위를 가진 자에게 존경을 표시하고, 정당하게 얻은 권위를 행사하는 지도자에게 존중을 보일 수 있는 화법 자체에 죄가 없다. 같은 화법을 가지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저항을 무례한 말하기로 단죄할 때 억압이 작동한다.

 

생각해 보면, 말이란 압도적 권력을 행사하는 불의에 저항하는 약자와 소수자가 동원할 수 있는 합법적이고 정당한 무기이기도 하다. 나이 든 상급자가 지위를 이용해서 무리하게 성적으로 접근할 때, 어린 하급자가 선택할 수 있는 저항의 방법 중 하나가 ‘무례한’ 말하기다. 그러므로 욕 잘하는 젊은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드라마를 함께 보며 웃는 일은 좋은 연습이 된다. 앞으로 공직자이건, 직장 상사이건, 학교 선생이건 억압하는 자를 그냥 지나치지 말자. 자신의 권력을 남용해서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려는 자를 보면 주저치 말고 이렇게 말하자. “닥쳐 이 고라니 새끼야.”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