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생. 정가에서 너도나도 부르대는 말이다. 그러다보니 민망한 사건도 곰비임비 일어난다. 민생에 무능한 정부를 매섭게 심판한 총선 앞에서 정작 당사자인 청와대를 보라. ‘민생을 외면한 국회에 대한 심판’이란다. 딴은 청와대만이 아니다. 반사이익으로 제1당이 된 더불어민주당의 김종인은 ‘구조조정’에 앞장섰다. 야당이 쪼개져 유권자들은 ‘고문’당하며 투표해 마침내 국회를 바꿨는데도 민생이 나아질 전망은 ‘미세먼지’로 자욱하다.
더구나 언론들마저 마땅히 짚어야 할 사안을 의제로 설정하지 않고 어물쩍 넘기기 일쑤다. 심지어 저마다 한국 언론을 ‘대표’한다고 자처하는 미디어들은 언론자유지수가 곤두박질치고 있어도 아예 모르쇠다. 국제기구가 발표한 언론자유지수 따위는 무시할 만큼 권력과 독과점 미디어들이 ‘민생’을 중시한다고 애써 ‘너그러움’을 가진다해서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저들의 ‘민생 살리기’가 단순히 구호에 그치지 않고 민생 죽이기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해고’ 허용과 자본에 대한 규제완화를 총선 뒤에도 ‘민생 법안’으로 우겨대는 두꺼운 철면을 볼라치면 그 무지와 오만에 스멀스멀 분노가 올라온다. 언론자유지수에 담긴 정치커뮤니케이션의 의미를 새겨야 할 까닭이 여기 있다.
국경없는기자회가 해마다 발표하는 세계 언론자유지수에서 한국은 역대 최하위로 70위까지 떨어졌다. 노무현 정부 시절 31위와 견주면, 이명박과 박근혜를 거치면서 한국 공론장이 얼마나 위축되었는가를 새삼 확인할 수 있다. 평가문항에는 미디어의 독립, 자기검열, 뉴스 생산구조, 다원주의, 취재 및 보도 투명성이 두루 포함돼 있다. 또 다른 국제기구인 프리덤하우스가 발표한 보고서에서도 한국의 언론자유지수는 66위다.
눈여겨볼 대목은 언론자유지수 상위국이다. 국경없는기자회 조사에서 언론자유 1위는 핀란드다. 네덜란드 2위, 노르웨이 3위, 스웨덴이 8위다. 프리덤하우스 발표에선 핀란드가 스웨덴·네덜란드·벨기에와 공동 2위로 노르웨이가 1위다. 두 조사 모두 북유럽 국가들이 상위권이다. 무엇을 의미할까.
언론이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할수록, 뉴스 생산구조가 민주적일수록, 그래서 민중이 의견을 자유롭게 표출하며 여론을 형성할수록 선거에서 보편적 복지를 공약하는 정당이 집권한다는 원칙을 도출해낼 수 있다. 모든 학문이 그렇듯이 가설이지만, 나는 그 원칙을 ‘민중언론학’의 주요 명제 가운데 하나로 삼고 있다.
민주노총과 노동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전경련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_경향DB
바로 그 점에서 언론자유지수를 곰곰 되새길 필요가 있다. 한국에 무슨 언론자유가 없느냐고 되레 눈 흘길 윤똑똑이들이 적지 않기에 더 그렇다.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에서 해직된 기자들이 애면글면 법정 싸움을 벌이는 모습은 한국 언론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기자 해직에 그치지 않는다. 보편적 복지를 주장하면 살천스레 ‘주홍글씨’를 갈겨대는 고위 언론인들이 한국 언론계를 주름잡고 있다. 그 ‘언론 귀족’들은 후배 언론인들의 ‘기자 정신’만 틀 지우고 있지 않다. 무지에 더해 조야한 논리로 마구 써대는 ‘기레기 칼럼’들로 인해 대한민국 정치·경제·사회 전반의 여론지형이 뒤틀려 있다. 심지어 교수 사회마저 천박한 미디어 논리에 물들고 있다.
보편적 복지라는 말에 대뜸 ‘포퓰리즘’을 떠올리는 사람들을 볼 때 우리는 언론자유의 수준을 생생하게 실감할 수 있다. 알바로 학업 시간을 뺏기면서도 정치에 환멸을 느껴 투표하지 않는 젊은 세대에서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벌이는 생존권 투쟁을 ‘실업자들 앞에 배부른 짓’이라고 도끼눈 부라리는 장년세대에서도 ‘신문·방송 복합체’의 해악은 묻어난다.
보편적 복지가 구현된 북유럽을 유토피아라도 되는 듯 찬양할 뜻은 전혀 없다. 하지만 그 나라와 우리의 민생 수준은 차이가 무장 크다. 민중이 정치적 의견을 자유롭게 소통하고 여론을 형성하는 과정에 권력과 자본의 개입이 최소화한 나라가 보편적 복지를 이룬 현실은 기실 한국과 동전의 양면이다. 권력과 자본이 언론을 앞세워 여론을 왜곡하는 나라에서 보편적 복지는 비현실적 망상으로 조롱받기 마련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의 지원을 받은 어버이연합이 보편적 복지를 추진하는 사람들을 적대시하는 살풍경은 애처로움마저 자아낸다. 전경련과 달리 ‘어버이’는 물론 ‘일베’도 복지를 누릴 권리가 있지 않은가. 실로 그들은 독과점 미디어의 가장 얄궂은 피해자들이다.
그렇다고 언론만 탓하며 세월 보낼 일은 아니다. 민생을 살리는 일차적 책임은 정치인들에게 있다. 민중이 바꿔놓은 20대 국회에서 뜻있는 정치인들이 과거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그들부터 독과점미디어들이 날마다 주입하는 저급한 논리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묻고 싶다. 그 각오 다졌는가? 민생 부르대기는 그 다음이어야 옳다.
손석춘 | 건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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