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인 아날로그 매체에서 디지털 매체로 중심이 옮겨가면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우선 수용방법이 달라졌다. 본방사수라는 표현이 있다. 이 말은 곧 본방을 보는 사람들의 비율이 급격히 줄어가는 방송의 위기 상황을 의미한다.
지상파가 여전히 높은 시청률을 나타내고 있지만 이제 채널별 시청자의 평균 연령대는 40대 후반에서 50대 사이가 되고 말았다. 디지털 세대는 지상파 콘텐츠를 수용해도 기존의 방식으로는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점점 모바일 플랫폼으로 옮아간다.
수용방식이 변했는데 콘텐츠가 그대로일 수 있을까? 디지털 세대가 기존의 전파 수신과 다른 방식으로 소비하는 콘텐츠의 선호도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짧고 압축적인 내용이 우선이다. 긴 호흡의 콘텐츠가 설 자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나마 일정한 시간을 들여 집중할 수 있는 PC에서 콘텐츠를 수용하던 방식과 이동하며 조각난 시간을 이용해 모바일로 시청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기 때문이다. 지상파 콘텐츠를 유통시키려면 재가공이 필수라는 압박이 주어진다. 이런 압박이 원 콘텐츠 제작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더 나아가 새로운 플랫폼들은 이제 지상파 콘텐츠에 의존하지 않고 그들의 플랫폼에 특화된 콘텐츠들을 생산한다. 그 콘텐츠들의 수용이 아직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사업적으로 긍정적인 전망을 할 수 있는 정도로 진전했다고 봐야 한다. 문제는 모바일에 최적화된 수용자들의 선택을 극대화하려고 3초 전략을 고민한다는 점이다. 서울디지털포럼에서 우상범 메이크어스 대표는 수용자의 선택은 3초에 승부가 난다고 했다. 3초간에 승부를 봐야 하는 콘텐츠 구성! 새로운 플랫폼 즉 SNS를 이용하는 소비자들의 특성에 맞는 콘텐츠 생산이 콘텐츠의 내용과 형식에 어떤 변화를 초래할까?
수용자 즉 소비자 중심이라고 해서 그런 내용 생산을 바람직하다고만 평가하기 어렵다. 맞춤형 생산은 수용자 중심의 사고일지 모르지만 역으로 이런 과정에서 생산되는 내용물들이 개인을 넘어서 사회를 고민하는 주제를 담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물론 소수가 생각하는 바가 다수의 생각을 좌우하는 일방적 전달과 수동적 소비 형태의 과거 매체 소통 방식이 바람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새로운 플랫폼에서 진행되는 콘텐츠 생산과 소비 역시 지나칠 정도로 고객 맞춤형이 되면서 사회적 의제를 소비할 가능성은 줄어든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즉 저널리즘의 고민은 더욱 커진다.
전문화라는 미명 아래 개인을 점점 더 부품화하도록 요구하는 현재의 사회 현상, 부품화된 개인에 맞춰가는 콘텐츠의 생산 그리고 사회적 의제의 실종. 다시 말해 저널리즘의 실종이다. 사실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새로운 형식의 콘텐츠에 저널리즘의 가치가 구현되도록 할 수 있는 힘은 기존 저널리즘 영역에 대한 개인의 신뢰에 기반을 둔다. 변화를 부정하기도 어렵고 변화를 수용하면서 그 속에서 바람직한 가치들을 더욱 키워내야만 한다는 주장을 부정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변화에 대한 우려가 가시지 않는 것은 새로운 플랫폼들 속에서 바람직한 가치들을 키워낼 잠재력이 지금 현실 속에 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번 총선에서 공영방송이나 종편의 보도는 예상대로 매우 편파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이진숙 대전 MBC 사장은 아시아 기자협회가 주최한 콘퍼런스에서 “현재 한국 언론은 정부로부터 꽤 높은 수준으로 자유롭다. 한국 언론이 당면한 최우선 과제는 생존이다”라고 했다. 자본의 영향력이 더 커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려 했던 표현이겠지만 이진숙 사장의 처지에서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이미 우리 방송들은 정치권력이 상시 압력을 넣지 않아도 될 만큼 순치됐기 때문이다. 알아서 하는 언론인들이 정치적 압력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상 정치적 통제도 사라지지 않은 상태에서 자본의 통제가 증대한다는 점은 더욱 심각한 문제다. 정치권력의 정책들은 대기업 위주로 돌아가고 대기업들이 경제 권력으로서 우리 경제의 대부분을 좌우한다. 그리고 대기업의 광고에 의존하며 이를 제대로 비판하지 못하는 언론들에 대한 신뢰는 바닥이다. 또한 저널리즘의 가치를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대에게 제공하는 맞춤형 콘텐츠가 저널리즘의 가치를 실현할 거라고 기대하기도 어렵다.
수용자 중심을 외치는 새로운 플랫폼 환경에서도 민주주의와 민주주의를 가능케 하는 저널리즘 가치는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미래에 이것이 가능하려면 기존 매체의 저널리즘을 회복하는 것이 필수적이지 않을까?
지상파가 여전히 높은 시청률을 나타내고 있지만 이제 채널별 시청자의 평균 연령대는 40대 후반에서 50대 사이가 되고 말았다. 디지털 세대는 지상파 콘텐츠를 수용해도 기존의 방식으로는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점점 모바일 플랫폼으로 옮아간다.
수용방식이 변했는데 콘텐츠가 그대로일 수 있을까? 디지털 세대가 기존의 전파 수신과 다른 방식으로 소비하는 콘텐츠의 선호도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짧고 압축적인 내용이 우선이다. 긴 호흡의 콘텐츠가 설 자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나마 일정한 시간을 들여 집중할 수 있는 PC에서 콘텐츠를 수용하던 방식과 이동하며 조각난 시간을 이용해 모바일로 시청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기 때문이다. 지상파 콘텐츠를 유통시키려면 재가공이 필수라는 압박이 주어진다. 이런 압박이 원 콘텐츠 제작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더 나아가 새로운 플랫폼들은 이제 지상파 콘텐츠에 의존하지 않고 그들의 플랫폼에 특화된 콘텐츠들을 생산한다. 그 콘텐츠들의 수용이 아직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사업적으로 긍정적인 전망을 할 수 있는 정도로 진전했다고 봐야 한다. 문제는 모바일에 최적화된 수용자들의 선택을 극대화하려고 3초 전략을 고민한다는 점이다. 서울디지털포럼에서 우상범 메이크어스 대표는 수용자의 선택은 3초에 승부가 난다고 했다. 3초간에 승부를 봐야 하는 콘텐츠 구성! 새로운 플랫폼 즉 SNS를 이용하는 소비자들의 특성에 맞는 콘텐츠 생산이 콘텐츠의 내용과 형식에 어떤 변화를 초래할까?
수용자 즉 소비자 중심이라고 해서 그런 내용 생산을 바람직하다고만 평가하기 어렵다. 맞춤형 생산은 수용자 중심의 사고일지 모르지만 역으로 이런 과정에서 생산되는 내용물들이 개인을 넘어서 사회를 고민하는 주제를 담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물론 소수가 생각하는 바가 다수의 생각을 좌우하는 일방적 전달과 수동적 소비 형태의 과거 매체 소통 방식이 바람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새로운 플랫폼에서 진행되는 콘텐츠 생산과 소비 역시 지나칠 정도로 고객 맞춤형이 되면서 사회적 의제를 소비할 가능성은 줄어든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즉 저널리즘의 고민은 더욱 커진다.
이번 20대 총선 SBS 개표방송의 이인제 의원 소개 영상. 인터넷에서 붙은 별병 '피닉제'를 형상화했다.
수용자의 선택을 중심으로 생산을 고민하는 체제는 일견 긍정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수용자의 선택에 의존하는 콘텐츠의 기획이 사회적 의제를 포함할 가능성은 매우 적다. 공론장을 통해서 의제가 발현되는 방식이 아니라 파편화된 개인의 욕구를 반영한 기획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 현상을 자본이 좌우하는 경우 그 경향성은 더욱 심해질 것이다.전문화라는 미명 아래 개인을 점점 더 부품화하도록 요구하는 현재의 사회 현상, 부품화된 개인에 맞춰가는 콘텐츠의 생산 그리고 사회적 의제의 실종. 다시 말해 저널리즘의 실종이다. 사실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새로운 형식의 콘텐츠에 저널리즘의 가치가 구현되도록 할 수 있는 힘은 기존 저널리즘 영역에 대한 개인의 신뢰에 기반을 둔다. 변화를 부정하기도 어렵고 변화를 수용하면서 그 속에서 바람직한 가치들을 더욱 키워내야만 한다는 주장을 부정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변화에 대한 우려가 가시지 않는 것은 새로운 플랫폼들 속에서 바람직한 가치들을 키워낼 잠재력이 지금 현실 속에 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번 총선에서 공영방송이나 종편의 보도는 예상대로 매우 편파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이진숙 대전 MBC 사장은 아시아 기자협회가 주최한 콘퍼런스에서 “현재 한국 언론은 정부로부터 꽤 높은 수준으로 자유롭다. 한국 언론이 당면한 최우선 과제는 생존이다”라고 했다. 자본의 영향력이 더 커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려 했던 표현이겠지만 이진숙 사장의 처지에서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이미 우리 방송들은 정치권력이 상시 압력을 넣지 않아도 될 만큼 순치됐기 때문이다. 알아서 하는 언론인들이 정치적 압력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상 정치적 통제도 사라지지 않은 상태에서 자본의 통제가 증대한다는 점은 더욱 심각한 문제다. 정치권력의 정책들은 대기업 위주로 돌아가고 대기업들이 경제 권력으로서 우리 경제의 대부분을 좌우한다. 그리고 대기업의 광고에 의존하며 이를 제대로 비판하지 못하는 언론들에 대한 신뢰는 바닥이다. 또한 저널리즘의 가치를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대에게 제공하는 맞춤형 콘텐츠가 저널리즘의 가치를 실현할 거라고 기대하기도 어렵다.
수용자 중심을 외치는 새로운 플랫폼 환경에서도 민주주의와 민주주의를 가능케 하는 저널리즘 가치는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미래에 이것이 가능하려면 기존 매체의 저널리즘을 회복하는 것이 필수적이지 않을까?
김서중 |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미디어칼럼+옴부즈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디어 세상]언론사에 문화가 없다 (0) | 2016.06.06 |
---|---|
민생 살리기와 언론자유지수 (0) | 2016.05.30 |
[미디어 세상]우리의 하루는 몇 시간일까? (0) | 2016.05.15 |
[사설]KBS 보도 일상적 검열한 길환영 사장, 간섭한 홍보수석 (0) | 2016.05.13 |
[미디어 세상]독자들의 삶은 변했다 (0) | 2016.05.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