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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리즈=====/최희진의 뉴스 속 인물

신문에 의견광고 내는 인터넷동호회 ‘세상을 바꾸는 여자들’

ㆍ"이젠 기사제목만 봐도 감이와요, 걸러보게 되죠”

지난해 이맘때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시민들 사이에 유행했던 놀이가 하나 있다. ‘신문에 의견 광고 내기’다. 의견 광고를 하면 정부에 비판적 여론을 전달할 수 있고 지지하는 신문사를 후원할 수도 있으니 일석이조였다. 
 


인터넷 동호회 ‘세상을 바꾸는 여자들’ 운영자 우정민, 박소윤, 박안나, 이영숙씨(왼쪽부터). |김정근기자

촛불집회가 끝나면서 의견 광고는 줄어들었다.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그런데 촛불집회 1주년이 지나도록 신문에 의견 광고를 내는 촛불시민들이 있다. 경향신문이나 한겨레의 독자라면 한번은 보았을 이름, 인터넷 동호회 ‘세상을 바꾸는 여자들(이하 세바여·http://cafe.naver.com/letemansei)’이다.

이 ‘여자들’은 대체 어떤 여자들이기에 남들은 진작에 그만뒀다는 의견 광고 게재를 아직까지 고집하고 있을까. 지난 16일 ‘세바여’의 운영자인 이영숙(33), 박소윤(32), 박안나(29), 우정민(26)씨를 만났다. 모임의 주동자인 정민씨는 처음 카페를 만들 때만 해도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다고 했다.

한번이 두번되고 두번이 1년됐네

“(정민) 저는 ‘레몬테라스(인터넷 인테리어 동호회)’ 회원이었는데 신문에서 ‘소울드레서(인터넷 패션 동호회)’가 낸 의견 광고를 봤어요. ‘레몬테라스’ 회원 중에서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광고를 한번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광고비를 모을 목적으로 세바여 카페를 지난해 5월15일 급조한 거죠. 그 때만 해도 세바여 활동은 광고만 잠깐 하고 끝내는 줄로 알았어요.”

“(영숙) 처음 회원은 운영자 7명이었어요. 개설 첫날 운영자들끼리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집회에서 사용할 현수막도 같이 만들자는 의견이 나왔어요.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 9시 뉴스에 경기 과천의 어느 주택에서 ‘우리집은 광우병 소고기를 먹지 않습니다’라는 내용의 현수막을 내걸었다는 뉴스가 나온 겁니다. 그 뉴스를 본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광우병 현수막’을 검색했는데 저희 카페가 검색됐나봐요. 준비도 제대로 되지 않은 카페였는데 네티즌들이 몰려와서 현수막이 얼마냐, 계좌번호는 뭐냐고 물어보니까 정신이 하나도 없었죠. 부랴부랴 운영자들끼리 돈을 갹출해서 일단 현수막부터 만들었어요. 그때 현수막이 거의 1000장 가까이 나갔던 것 같아요.”

본의 아니게 현수막부터 제작했지만 세바여 본연의 존재 목적은 신문 광고였다. 운영자들은 카페에 공지를 띄우고 회원들을 상대로 광고비를 모금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신문 하단 광고란의 가격이 모금된 액수보다 비쌌던 것이다. 애석하기 짝이 없었지만 세바여는 눈물을 삼키고 하단 광고에 대한 미련을 접었다. 그 대신에 아쉬운 대로 영화 주간지 ‘씨네21’의 지면 한쪽을 330만원에 구입해 의견 광고를 실었다. 광고는 만족스럽게 나갔는데 이번엔 다른 문제가 생겼다. 모금액이 남은 것이다. 회원 숫자대로 도로 나눠 가질 수도 없고 난감한 노릇이었다.

돈 쓸 곳을 찾던 운영자들은 묘안을 발견했다. 신문 하단 광고란은 비싸서 포기했지만, 자그마한 의견 광고는 적은 돈으로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세바여는 일주일에 두번씩 회비가 떨어질 때까지 경향신문과 한겨레에 광고를 내기로 했다.

광고 문구와 그림은 안나씨가 맡았다. “종이컵과 초 vs 방패와 곤봉, 폭력은 어느 쪽입니까?”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등의 광고가 세바여의 이름을 달고 신문지면에 인쇄됐다. 광고가 나가는 날이면 회원들은 경향신문과 한겨레를 모두 사 볼 정도로 즐거워했다. 특히 “아 글쎄 니가 싫다고 니가”(여기서 말하는 ‘너’는 당연히 이명박 대통령이다)처럼 화끈한 문구가 나오는 날엔 더더욱 반응이 좋았다.


우리 ‘배후 세력’ 아니라니까

그러나 세바여는 촛불집회가 초래한 공안정국을 비켜가지 못했다. 서울시 교육감 선거를 앞두고 주경복 후보를 지지하는 내용의 광고(“주말 나들이엔 경복궁이 최고래요~”)를 냈다가 영숙씨와 안나씨가 선거법 위반으로 검찰 조사를 받은 것이다. 필화(筆禍)라면 필화다.

“(안나) 선거관리위원회에서 연락 받았을 때는 분명 선거법 위반이었어요. 그런데 사건이 검찰로 넘어가니까 ‘누가 사주했느냐’고 묻지를 않나, 갑자기 촛불의 배후를 수사하는 정치 사건으로 변질되더라고요.”

“(영숙) 검찰에서 일하는 분들은 인터넷 문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시더군요. 저희가 현수막을 공동구매해서 판매했다고 하니까 ‘촛불집회에 나온 모든 현수막을 너희가 지원했느냐’고 묻는 거예요(웃음). 아니라고 했더니 이번엔 ‘현수막을 어디서 만들었느냐’고 물어요. 사실대로 대답했죠. ‘인쇄소에서요.’(웃음) 제가 대놓고 ‘인터넷 카페 한번도 안 해보셨죠?’라고 물어봤더니 ‘네’라고 대답하는 거예요. 세바여가 집회에 나온 것도 누가 불순한 의도를 갖고 사람들을 선동한 것 아니냐고 하더군요. 그게 아니라고 설명을 드렸는데도 이해를 못하세요.”


다같이 미래로 나아가면 좋으련만, 검찰의 시계는 여전히 20세기였다. 세바여는 심각한 문화지체 현상을 겪고 있는 검찰을 계몽하려고 애썼으나 소득은 없었다. 검찰은 이들을 불구속 기소했고 두 사람은 법원에서 각각 80만원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촛불집회 이전까지만 해도 시위는커녕 정당이나 시민단체에 푼돈 한번 줘본 적 없다는 이들은 창졸간에 ‘선거사범’이 됐다. 회원들은 운영자의 벌금을 마련하기 위해 집에서 안 쓰는 물건을 내놓고 후원 바자를 열었다. 어떤 회원은 하루에 김치를 40~50㎏씩 담가 다른 회원들에게 판매했다. 실비를 제외한 수익금은 벌금을 내는 데 보탰다. 당초 광고비를 모금하려고 모였던 회원들은 이제 서로 돌보고 위하는 동지가 되어 있었다.

세바여 회원들은 아는 것도 많아졌다. 예전엔 신문기사를 별 생각없이 읽었는데 이제는 제목만 봐도 이 기사를 왜 썼는지 감이 온단다. 촛불집회를 거치며 신문이 진실만을 보도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영숙) 지난해 조선일보가 ‘레몬테라스’ 카페에 올라온 글을 기사화한 적이 있어요. 어떤 회원이 “쥐새끼 한마리를 죽여야 하는데 일본 야쿠자를 고용할까요”라고 장난으로 글을 올렸어요. 저희는 웃고 넘어갔는데 조선일보가 정색을 하고 ‘대통령 암살기도 카페’라고 기사를 쓴 거예요. 글 쓴 분이 경찰 조사까지 받으셨어요. 경찰들도 조사를 하라니까 하긴 하는데, 어이가 없잖아요. 몇 달을 끌다가 흐지부지됐다고 하더라고요. 이 사건 때문에 ‘이 신문사가 이런 데구나’ 알게 됐어요.”

“(소윤) 요즘은 기사를 보면 무슨 생각으로 썼는지 대충 알아요. 걸러 보게 되죠.”


윤리적 소비공동체로 변신 중

이제 와서 새삼스레 언급하지 않아도 촛불집회에서 여성들의 활약상이 대단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온 1번 주자부터가 여학생들이었다. 유모차를 끌고 나와 보란 듯이 행진하고, 생면부지의 집회 참가자들에게 간식 먹이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도 여성들이었다.

불운하게도 이 정부는 웬만큼 극성스러운 아줌마들로는 대적할 수 없을 만큼 완고한 것으로 드러났지만, 여자들은 촛불이 사그라든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광장에선 물러섰지만, 인터넷에 참호를 파고 촛불의 진화를 모색하는 진지전을 시작한 것이다.


지난해 세바여 회원들의 활동이 광우병 쇠고기를 반대하는 부정적 운동에 그쳤다면, 최근 게시판에선 안전한 식품을 구입할 수 있는 거래처를 공동으로 개척하자는 긍정적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깨끗한 풀을 먹고 건강하게 자란 한우만 판매하는 농가와 직거래 판로를 마련한 것이 좋은 예다. 이는 질좋은 식품에는 그에 합당한 가격을 지불하자는 윤리적 소비 운동과도 궤를 같이 한다.

“(영숙) 지난해엔 사람들과 거리에서 만났는데 이젠 현장으로 나가는 대신에 생활 속에서 각자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세바여 회원들은 한우 농가와 직거래로 고기를 받아먹고 있어요. ‘소 한마리 잡는다’는 공지가 올라오면 회원들이 그 소를 부위 별로 나눠서 가져가는 거죠. 야채는 직접 기르기도 해요. 지난 김장철에는 친정이 전남 신안인 회원이 신안 천일염을 소개해 주셔서 소금 공동구매를 하기도 했어요. 카페 안에서 자급자족이 되는 거예요. 먹거리 네트워크가 형성된다고 할까요.”

“(안나) 이른바 윤리적 소비라고 하잖아요. 안전한 식품을 골라 먹기만 하겠다는 게 아니라 그것을 제값 주고 사오겠다는 거예요. 그래야 농가가 유지돼서 계속 우리한테 안전한 식품을 공급할 수 있으니까요.”

정민씨는 “지난해 여름처럼 열정적으로 사람들과 거리에서 만나지 못해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서도 “다들 촛불을 통해 배운 것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며 살고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회비가 떨어지는 날까지 의견 광고를 계속할 계획이라고 했지만 그날이 언제인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정민) 사실 이렇게 하다보면 끝이 없을 것 같아요. 카페를 운영하면서 알게 된 건데 재능 있는 분들이 정말 많아요.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회원들 안에서 다 해결할 수 있을 정도예요.”

“(안나) 쇠고기까지 되는데 안 되는 게 어디 있겠어요. 택배만 있으면 우린 뭐든지 할 수 있어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