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연구소’의 안철수 이사회 의장(46)은 그 출발부터 ‘평범하다’는 수식어와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컴퓨터 보안회사를 차리기 위해 미래가 보장된 의사 자리를 박차고 나올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중소벤처기업이 ‘대박’을 낼 가능성은 또 얼마나 희박한가. 하지만 그는 미련없이 떠났고 보란 듯이 성공했다. 1995년 설립된 연구소는 4년 만인 1999년 연매출 100억원을 돌파한 데 이어 지난해엔 500억원 고지를 넘었다. 그 자신은 기업 경영에서 공익과 윤리, 사회적 책임을 유독 강조해 ‘존경받는 기업인’ 명단에 예외없이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안철수 의장은 지난 11일 미국에서 졸업식을 마친 뒤 13일 저녁 곧바로 귀국해 업무를 재개했다. 유학 도중에도 한국을 드나들며 회사 일을 처리하고 국내 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그가 “한 순간도 허비하지 않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이유다. |강윤중기자
그가 의대 대학원생이던 88년 개발했던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 ‘V3’가 다음달 1일이면 탄생 20주년을 맞는다. 20년간 한우물을 파서 이 정도의 성취를 이룬 기업인이라면 이제 등 따습고 배 부를 일만 남았다는 게 세간의 상식이다. 그런데 안 의장은 또 한번 ‘사서 고생하기’를 자처했다. 40대 초반의 나이로 2005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로 훌쩍 유학을 떠나더니, 이달 초 MBA 학위를 들고 돌아왔다. 지난 1일엔 카이스트 석좌교수로 임명됐다. 의학 박사와 최고경영자(CEO)를 거쳐 공대 교수로서 ‘제3의 인생’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는 “CEO를 그만둘 생각은 없었는데, 어느날 새로운 길이 보이더라”고 했다. 지난 14일 서울 여의도에 있는 안철수연구소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신분은 ‘안 교수’로 달라졌지만, 차분한 목소리로 입바른 말을 잘하던 ‘바른생활 사나이’의 모습은 여전했다.
-회사를 경영하다 학생으로 돌아간 소감이 어땠습니까.
“지금까지 19년을 제외한 나머지 인생을 전부 학생으로 살았습니다. 초등학교 6년, 중·고등학교 6년, 의과대학 6년에 의대 석·박사 5년, 공학석사 2년, 이번에 경영학 석사 2년까지 합치니 27년입니다. 가장 긴 직업이었으니까 돌아갔다는 느낌보다는 오히려 친숙하고 익숙했어요.”
-40대에 학위 과정을 시작한다는 것이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텐데.
“사실 제 나이에 편하게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은 많아요. 방문 연구원으로 갈 수도 있고. 그런데 편하게 하면 나중에 남는 게 없어요. 천재들은 고생 안 하고 많은 것을 얻을지 몰라도 저는 그렇지가 못해요. 시험 치르고 프로젝트하면서 고생해야 결국엔 그게 제 실력이 되더군요. 제가 공부를 다시 시작한 이유가 제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실력이 부족한 중소 벤처기업 경영자나 중간관리자들에게 좋은 조언자가 되기 위해서였거든요. 배워서 남 주기 위한 공부이다보니, 제 자신이 준비가 더 많이 되어 있어야 하겠더라고요.”
-다른 벤처기업에 조언자가 되신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2년간 학생으로 수업을 듣다보니 경험만으로 채울 수 없는 부분이 눈에 띄었습니다. 제 자신만 봐도 그렇거든요. 경영을 오래 했는데도 안 채워지는 부분들. 그런 점들을 벤처기업에 가르쳐주는 겁니다. 대전에 근거지를 두고 있으므로 대덕연구단지 쪽의 기업들을 보게 될 것 같습니다. 안연구소 이사회가 열릴 때 올라오면 서울 지역도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우선 여러 케이스들을 보고 저도 적응을 해야 할 겁니다. 미국으로 떠난 지 3년이 지났는데, 한국 사회도 많이 바뀌었을 거고 벤처 창업 환경도 많이 바뀌었을 거예요. 서울과 지방이 또 다를 테고. 부지런히 쫓아다니면서 파악을 해야 되겠죠.”
-안연구소에 최고학습책임자(CLO·Chief learning officer)로 남겠다고 밝히신 것과 같은 얘기입니까.
“그렇습니다. 안연구소의 이사회 의장직도 유지하는데, 비상근인 거죠.”
-카이스트 강의가 9월에 시작됩니다. 무엇을 가르칩니까.
“제가 가르칠 수 있는 건 크게 두 분야입니다. 하나는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입니다. 제가 이번 MBA 전공을 이것으로 했어요. 기업가 정신이 학문은 아닌 것 같더라고요. 전달가능한 지식이 아니라는 거죠. 타고 나는 겁니다. 그래서 교과서 위주가 아니라 창업자들의 자서전이나 인터뷰, 사례 연구를 읽게 하고, 생각을 서로 말하게 하면 거기서 많이 얻을 것 같더군요. 학생들 스스로 깨달아가는 거죠. 나머지는 제가 10년 전에 학위를 취득했던 기술경영학인데 이건 기술 혹은 경영에 전문성이 있는 사람들에게 다른 분야를 알리는 것이기 때문에 학부에는 적합하지 않아요. 대학원에 과정이 생기면 그 학생들을 가르치고, 그렇지 않으면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가르치게 됩니다.”
-어떻게 새로운 일에 끊임없이 도전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저에게 추진력을 주는 힘은 세 가지입니다. 일단 일 자체가 의미가 있어야 하고, 두번째는 일이 재미있어야 하고, 세번째로는 그 일이 제가 잘할 수 있는 일이어야 해요. 의사를 그만뒀을 때도 그 일이 싫었던 게 아니에요. 의사는 지금 봐도 참 좋은 직업입니다. 사람 대 사람으로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직접 도와줄 수 있다는 점이 굉장히 좋거든요. 그래서 학생 때 구로동에서 봉사 진료도 했고.
하지만 저한테는 컴퓨터 바이러스 쪽이 훨씬 의미가 있더라고요. 의사는 저 말고도 많은데 이 일은 저밖에는 할 사람이 없었어요. 재미도 더 있었고. CEO를 그만두고 대학 교수가 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제일 편한 선택은 안연구소 CEO를 하는 거죠. CEO를 그만둘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CEO 9년차 때부터 자꾸 의미가 더 큰 일이 눈앞에 어른거리면서 저를 성가시게 하는 겁니다. 물론 이 길이 경영보다 어려워요. 다른 사람을 도와서 성공하게 만드는 일이니까요. 자신있다는 말은 못하겠는데, 잘할 가능성은 있는 것 같습니다.”
-교수로 자리를 옮기는 것도 화제가 됐지만, 안 교수의 발언은 대부분 기사화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언론의 관심이 부담스럽지는 않으신가요.
“당연히 부담스럽지요. 그게 어떤 기분이냐면, 제가 혼자서 공부를 하고 있어요. 그런데 제 뒤로 한 사람 두 사람 구경하러 와요. 나중엔 공부를 하다 주위가 소란스러워서 뒤를 돌아봤더니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저를 보고 있는 거예요. 그런 느낌이 들어요.”
-기업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바른말을 잘해서 그런 것 아닐까요.
“한국 사회는 너무 말이 많잖아요. 저도 말 보태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발언들로) 아주 조금이라도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는 일이 굉장히 중요한 것 같아요. 저는 발언할 때 절대로 이해타산과 상관없이 합니다. 20년 이상 글을 쓰면서 깨달은 게, 사람은 죽어도 글은 남더라고요. 거창하게 말하면 글은 역사의식이 있어야 하더군요. 순간을 모면하려고 이해타산이 섞인 글을 쓰면 죽고 나서 부끄러운 사람이 돼요. 아마 이런 진정성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과도한 관심이나 과대평가일 수도 있지만요.”
-발언 탓에 곤란을 겪은 적도 있을 것 같습니다.
“벤처버블이 정점이던 1999년 11월에 벤처 기업 95%가 망한다고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에선 벤처기업이 성공의 보증수표라고 했는데 미국은 반대였던 거죠. 1%만 성공했어요. 그때 제 순진한 생각으로는, 제가 경고를 하면 사람들이 조심해서 투자를 하고 성공 확률이 높아질 거라고 믿었던 거죠. 그런데 태어나서 그렇게 욕 많이 먹은 건 처음이었습니다. 뒤에서 욕하는 사람도 있었고 전화를 걸어서 ‘어제까지 투자하려고 했던 사람인데 인터뷰 보고 안 했다’고 물어내라고 하고…. 별 사람 다 있었어요.
그러다 2003년인가 참여정부에서 제2의 벤처 붐을 일으키자는 프로젝트를 진행했어요. 거기서 회의를 하는데, 말미에 부총리께서 벤처기업 95% 망하는 건 상식이 아니냐고 하시는 겁니다. 그 자리에 저를 욕했던 사람도 있었어요. 그 사람도 부총리 말이 맞다고 맞장구를 치더군요. 제가 그 말을 했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저 혼자서 ‘의미가 있는 일이구나, 사람들 생각이 조금씩이라도 바뀔 수 있구나’ 생각했어요. 다시 용기를 얻고 그 다음부터 계속 문제 제기를 했습니다.”
-청와대 미래기획위원회에 참여하시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입니까.
“이명박 정부가 이제 시작 단계인데 중소기업을 위한 정책은 아직 못 본 것 같아요. 그렇다고 5년 후만 기다릴 수도 없지 않습니까. 오늘 청와대에서 열린 출범식에 가서 중소기업이 왜 중요한지, 작은 정부가 왜 규제만 철폐해선 안 되고 감시기능도 함께 강화해야 하는지 얘기했습니다. 한 사람에게 2분씩만 줘서 말은 다 못했지만. 저는 김대중 대통령 때도 정책기획위원회에서 일을 해봤어요. 뒤에서 불평만 하기보다는, 정권과 상관없이 제가 믿는 올바른 방향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되겠더군요. 실행부서에 있는 사람들의 생각이 조금이라도 바뀌기를 바라는 거죠.”
-지금 벤처업계의 상황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벤처 1세대가 ‘메디슨’ 이민하 회장 시절이라면 저는 그 다음 세대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3세대는 ‘다음’이나 ‘NHN’ 등 벤처 붐 이후 기업들이고요. 여기까지는 스타 경영자들이 있는데 그 후로 지난 5년간은 없어요. 미국은 지금도 ‘페이스북’ 창업자 같은 사람들이 ‘비즈니스 위크’ 표지를 장식하거든요. 새로운 기업이 계속 생겨나요. 유독 한국에는 새로 자라나는 싹이 없는 상황입니다. 정말 큰 위기예요. 우리나라 경제 규모는 대기업만 가지고 버틸 수 없어요. 이미 그 수준을 넘어섰죠. 지금 자라나는 싹이 없다면 5년 뒤는 암담한 겁니다.”
“개인정보 유출 사태 보안예산 아낀 대가 치르는 것”
안철수 의장은 “실리콘 밸리에선 회사를 떠난 창업주들이 교수나 행정가가 되어
자신의 경영 경험을 사회에 환원한다”며 “이 같은 ‘창업자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강윤중기자
-이 같은 위기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우리나라 벤처기업·중소기업이 안 되는 이유가 첫째, 우리 실력이 부족해요. 미국 실리콘 밸리에는 각 분야마다 경험 있고 지식있는 인재들이 넘쳐나요. 반면 한국은, 저도 그랬지만, CEO뿐만 아니라 다 초보자예요. 보고 배울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두번째는 벤처기업을 도와주는 산업 인프라가 없어요. 전문성을 갖춘 아웃소싱 업체가 있으면 힘을 많이 덜 수 있어요. 집중해서 일만 하면 되니까. 우리나라는 그런 데가 없다보니 그게 경쟁력 약화로 이어지고.
세번째는 대기업이나 공공기관 중심의 거래 관행입니다. 중소기업이 부가가치를 인정받으면 그 이익으로 연구·개발(R&D)에 재투자하고 발전해 나가는 건데, 대기업으로부터 인건비만 받고 있어요. 후속 제품을 만들 여력이 안 되니 망하는 거죠. 그러면 글로벌 아웃소싱이라고 해서 외국의 중소기업과 거래를 합니다. 수출이 사상 최대라도 이익은 일본이나 중국의 다른 중소기업에 돌아가는 거예요. 정부에서 환율 방어 해봤자 소용이 없어요. 국민 세금으로 환율 방어하면 대기업은 좋아지는데 대기업과 거래하는 중소기업은 다른 나라에 있고. 대기업도 요즘은 60~70%가 외국인 주주 아닙니까. 누구를 위해서 (그런 정책을) 하는 건지 답답합니다.”
-최근 개인정보 유출 사건이 빈발하고 있습니다. 정보기술(IT)이 발달할수록 삶이 더 피곤해진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1920~30년대 ‘포드’가 보급형 자동차를 만들면서 사람들의 생활이 바뀌었어요. 도심에 살던 사람들이 여건이 더 좋은 교외로 이주하기 시작한 거죠. 사람이 기술을 만들었는데 이 기술이 라이프스타일을 바꾼 겁니다. 인터넷도 마찬가지예요. 사람이 인터넷을 만들었는데 인터넷 때문에 우리의 삶이 바뀌고 대통령도 바뀌고. 사람과 기술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거죠.
예전에 도둑이 없을 때는 문을 열어놓고 다니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다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자물쇠가 나왔잖아요. 컴퓨터 보안도 이것과 같아요. 우리가 컴퓨터라는 좋은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만들고 별 걱정 없이 잘 썼는데 이제 해커도 나오고 문제가 많아지는 거죠. 그래서 보안 장치들이 등장했는데 습관이 안 돼서 불편한 겁니다. 지금이 그 단계라고 봐요. 아마 좀 지나면 일종의 습관처럼 자리 잡을 것 같습니다. 기술도 사람이 의식적으로 신경쓰지 않아도 되도록 더 완벽하게 나갈 것이고요.”
“여기서 국가 경쟁력이 나뉘는 겁니다. 미국·일본 같은 선진국은 보안 예산으로 전체의 10%를 써요. 그런데 우리는 1%를 쓴다는 말이죠. 미국이나 일본, 효율 엄청나게 따집니다. 상상도 못할 정도예요. 아마 최대한 아낀 게 10%일 겁니다. 반면 우리 나라는 몇 년 동안 1%를 쓰면서 비용을 절감했다고 좋아하고 있어요. 그러니 이번처럼 1000만명 해킹 사태가 나는 거죠. 점을 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100% 예견이 가능한 결과입니다. 국가 대 국가 수준에서 벌써 경쟁력 차이가 나고 있어요. 지난 몇 년 간 비용 아낀 그 값을 이렇게 치르는 겁니다.
보안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이 다 그래요. 미국산 쇠고기 문제도 그렇고. 사회 전반적으로 성장통을 치르고 있다고 봅니다.”
-안 교수께서 조언자 역할을 넘어 직접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요. 정치 입문 계획은 없습니까.
“10년 전부터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정치권에서) 불렀으니까. 그래서 이제 잘 피해요. 이번 총선에도 신문에 나온 것(통합민주당 비례대표 제의) 말고도 더 있었어요. 장관도 하려면 할 수 있었죠. 노무현 정부에서 정보통신부장관 단독 후보였으니까. 그런데 파워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잖아요. 파워만 즐기고 책임을 안 지면 참 편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저는 그렇지 못합니다. 책임이 제 감당 범위를 벗어나요. 잘할 자신도 없고요. 저의 좁은 시야로 그런 일을 하면 주위 사람들 고생시키는 것밖에는 안 됩니다.”
“수익은 결과죠. 회사를 처음 만들 때 고민을 했던 게 ‘왜 사람이 모여서 일을 할까’ 하는 대목이었습니다. 초등학생 수준으로 생각을 정리했던 게, ‘한 사람이 할 수 없는 의미 있는 일을 여러 사람이 함께 이뤄가기 위한 것이다’였어요.
수익 창출이 목적이라고 불량식품을 만들어서 팔면 자기는 돈을 벌겠지만 전체로 보면 마이너스섬 게임이잖아요.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면서 자기만 벌면 존재의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이런 작은 생각의 차이가 지난 시간 동안 굉장히 큰 결정들을 다른 방향으로 가게 했습니다. 예를 들어 97년에 매출 10억원짜리 회사를 외국 기업이 1000만달러 줄 테니까 팔라고 했을 때도 고민 안 하고 그냥 거절했어요.”
-모범적인 발언만 하시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CEO답지 않게’ 골프나 술·담배도 전혀 안 하신다고 들었는데.
“제가 운동을 잘 못해요. 시간도 별로 없었고. 이번에 미국 갔을 때도 골프를 싸게 배울 수 있었는데 배울 시간이 없더라고요. 교수들이 숙제를 다음 수업까지 읽어가지 못 할 정도로 내줘요. 그러다보니 공부만 하게 되더군요. 또 한국에선 제가 골프를 치면 주말마다 약속에 나가야 해요. 그러면 제가 쓰러지겠더라고요, 주말까지 못 쉬면. 저는 주로 책을 쓰면서 주말을 보냅니다. 세상에서 제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게 책 쓰는 거라서요. CEO 하면서 지금까지 9권을 썼는데 이게 그런 시간들 빼서 쓴 것이라 (골프를 치면) 제 생활이 다 망가져요.”
-운전도 직접 하신다면서요.
“그 시간에 실무자가 일하는 게 더 좋잖아요. CEO라는 게 역할이 다를 뿐이지 ‘누구 위다’ 이런 개념은 아닙니다. 그게 제 기본적인 생각이고요. 또 제가 사람 부리는 게 익숙하지가 않아요. 불편해요. 아직도 직원들에게 존댓말하고. 직원들이 처음에는 불편해하는데 오래 지내다보면 익숙해 하더군요.”
-잠은 보통 몇 시간 주무십니까.
“요즘은 옛날보다 많이 자요. 6~7시간 정도. 95~97년에 미국에서 기술경영학을 배울 때는 이틀에 하루는 밤을 샜어요. 제가 영어가 처음이었거든요. 서른셋에 공부하러 갔는데 어학 코스를 못 했어요. 영어가 하나도 안 들려요. 게다가 경영학도 처음 듣는 것이고. 미국 가서 알았는데 저의 출석 번호가 1번이더라고요. 성이 안(Ahn)씨고 이름이 C로 시작해서. 교수가 막 시키니까, 미리 책을 안 읽어가면 수업시간에 들어가지를 못하겠더군요. 너무 겁나고 창피해서. 제가 영어 읽는 속도가 너무 느렸어요. 한 장 읽는데 처음에는 1시간 걸렸습니다. 한 100쪽을 읽어가야 하는데 그럼 100시간 걸리잖아요. 밤을 새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너무 ‘금욕적’으로 사시는 것 아니냐는 시선도 있습니다.
“제가 처음 인터뷰를 한 게 88년이었는데, 지난 20년 동안 한번도 말을 바꾸거나 거짓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소수의 사람을 오랫동안 속일 수도 있고 다수의 사람을 잠깐 속일 수도 있지만 다수의 사람을 오랫동안 속이지는 못하잖아요. 다 드러나는 법이에요. 생각해보니까, 제가 편한 방식대로 사는 것 같아요. 청교도적으로 참으면서 산 게 아니고. 저는 돈보다 중요한 게 명예이고, 이보다 더 중요한 게 마음 편하게 사는 거예요. 참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산 건 아니죠. 20년을 참을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삶의 방식이 하시는 일마다 모두 잘 되는 비결일까요.
“잘 되나요? (웃음) 안연구소 처음 4년은 다음달 월급을 걱정하면서 살았어요. 잘 될 거라는 기약도 없었고. 의대 시절에도 그랬어요. 그때 평범한 의대생들은, 이건 무슨 광고 문구같네요. (웃음) 아무튼 평범한 의대생들은 95%가 환자 보는 쪽으로 갔는데 저는 기초(생리학)로 갔거든요. 기초는 아무리 공부를 해도 연구하고 논문까지 쓰는 데 한 1년 걸려요.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 같은 거죠. 백신을 만들었던 게 이런 부분을 채워줬던 것 같아요. 사회의 일원으로 신세만 지는 게 아니라 저도 사회에 조금이라도 공헌한다는 그 느낌이 좋았어요.
제 생활 신조가 ‘make a difference(변화를 만들다)’입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기겠다는 욕심은 없어요. 다만 삶의 흔적은 남기고 싶어요. 조그만 것이라도 변해서 제가 죽고 없어도 그 흔적이 남아있으면 참 좋겠더군요. (힘든 시기도 있었지만) 중간에 포기 안 하고 끝까지 갈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건강은 어떠십니까.
“좋습니다. 예전에 일정이 너무 빡빡해서 크게 아팠던 적이 있어요. 미국에서 돌아오면서 ‘이제는 휘둘리지 않고 살아야겠다’ 생각했어요.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다른 사람 편의 봐주면서 살지는 말아야지 했는데, 벌써 징조가 좀…. 하루에 강의 요청이 30개씩 들어와요.”
-혹시 앞으로 제4의 직업을 가질 가능성도 있을까요.
“그럴 수도 있겠죠. 지금 같아서는 종신 보장을 받았으니까 계속 교수로 있고 싶습니다. 저희 아버님이 79세이신데 지금도 환자를 보세요. 어릴 때부터 보고 자라서 ‘나도 의과대학에 가면 아버지처럼 나이 들어도 가운 입고 동네 환자들 고쳐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열심히 살다보니까 갑자기 의사를 그만둬야 하더라고요. 그때 생각했어요. 미래 계획은 의미가 없다고. 매순간 최선을 다하면 그 다음 해야 할 일이 눈 앞에 보이더군요. CEO도 그만둘 생각을 안 했는데 결국 더 의미있는 일이 보였고. 지금도 마찬가지죠, 뭐. 미래는 몰라요. 열심히 살면 그걸로 되는 겁니다.”
-공익·윤리 경영 IT업계 ‘거물’로-
‘컴퓨터 고치는 의사’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던 안철수 의장은 1962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기계에 관심이 많았으나 의사였던 부친의 뒤를 이어 서울대 의대에 진학했다.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밟던 도중 ‘브레인 바이러스’가 전 세계에 피해를 입히고 있다는 기사를 읽고 88년 백신 프로그램 ‘V3’를 개발했다.
20대에 단국대 의대 전임강사 및 의예과 학과장까지 지냈으나 결국 컴퓨터로 진로를 틀어 95년 주식회사 안철수연구소를 세웠다. 안 의장은 바이러스 치료 프로그램이 전무하다시피했던 국내 소프트웨어 시장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며 일약 정보기술(IT) 업계의 ‘거물’로 부상했다. 회사를 세운 이후 경영 공부를 위해 미 펜실베이니아대 와튼 스쿨에서 기술경영학 석사를 취득했다.
기업 경영에서 공익적 가치와 윤리를 중시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2004년엔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불공정 거래 관행을 지적하며 “빌 게이츠도 한국에선 성공하기 어렵다”고 말해 이목을 끌었다. 2005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올해 미 펜실베이니아대 와튼 스쿨에서 MBA 학위를 취득했다. 오는 9월부터 카이스트 ‘비즈니스 이코노믹스 프로그램’에서 석좌교수로 강의를 시작하며, 안연구소에는 이사회 의장 및 최고학습책임자(CLO)로 재임한다. 지난 14일 출범한 대통령자문 미래개혁위원회 민간위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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