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학력위조 파문 1년2개월 다시 무대 복귀
윤석화가 “이화여대를 다니지 않았다”고 고백했을 때 그의 나이는 쉰둘이었다. 연극배우이면서 공연 제작자로, 또 월간 ‘객석’의 발행인이자 ‘설치극장 정미소’의 대표로 1인4역을 해내며 공연예술계에서 일가를 이룬 그였다. 이제 한숨 돌리고 잠시 편안해져도 좋을 나이에 그는 ‘학력 위조’라는 불명예를 안고 도망치듯 홍콩으로 떠났다.
모습을 감춘 지 1년2개월여 만에 윤석화가 배우로 돌아왔다. 그는 관객 앞에 속죄하는 심정으로 내면을 비우고 더 낮아지기로 했다. 그래서 선택한 복귀작이 1983년 초연했던 <신의 아그네스>다. 12월6일 첫 공연을 앞두고 연습 중인 윤석화를 지난달 31일 서울 대학로에 있는 ‘정미소’에서 만났다.
그는 “당시엔 저의 상처를 끄집어내서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이 참 힘들었다”며 “사건이 지나가고 난 뒤 부끄러움은 남아있지만 마음은 한결 자유로워졌다”고 말했다. 배우로 복귀하는 일에 대해서는 “관객들께서 제 연극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연극 자체로만 봐주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몇 년 만에 배우로 무대에 서는 겁니까.
“3년. <영영이별 영 이별> 후에 정극으로 이게 3년 만이죠.”
-지난해 학력 위조 사건 이후 1년2개월여 만에 대중 앞에 다시 섰습니다. 컴백을 결심했을 때는 언제 나가면 좋을지 시기를 살폈을텐데요. ‘지금쯤이면 대중이 나를 받아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까.
“그런 건 없어요. 작품을 몇가지 놓고 고민하고 생각만 해요. 그러다보면 가장 좋은 때를 만날 것이고 그 상황에서 최선의 작품을 선택할 것이고. 그렇게 모든 것을 공간과 시간에 내맡기던 중에 이렇게 됐어요.”
-복귀작 <신의 아그네스>는 83년 직접 기획해 주연 ‘아그네스’ 역할을 연기했던 작품입니다. 이번에는 ‘닥터 리빙스턴’ 역할인데요. 아무래도 나이 어린 아그네스 역은 부담스러웠던 걸까요.
“물론 연극이라는 게 영화나 텔레비전과 달리 나이를 떼어놓는 메타포가 있습니다. 제가 오리지널 아그네스였고 무엇보다 이 작품을 제가 기획·번역하기도 했고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나이에 아그네스를 한다면 정말 우스꽝스러운 일이죠.
언젠가는 닥터를 해보는 게 꿈이었어요. 그렇지만 제가 닥터를 하고 싶다고 느꼈을 때는 이뤄지지 않았고요. 어떤 면에서는 마음 속에서 닥터 역할을 떠나보냈습니다. 나이를 점점 먹으니까. 2006년은 제가 준비했던 안식년이고 또 지난해는 본의 아니게 얻은 안식년이었는데요. 그 시간을 통해 제가 했던 연기 생활, 작품들을 돌아보면서 <신의 아그네스>가 정말 좋은 작품이라는 점을 새록새록 느꼈습니다. 이 작품을 관객들한테 제대로 한번 보이고 싶었어요. 나이를 먹었지만 아직 닥터는 할 수 있으니까.”
-하루 연습량이 얼마나 됩니까.
“요새 보통 6시간씩 하고 있어요. 그날그날 연습한 것을 녹음해서 조연출이 컴퓨터로 보내주기 때문에 집에 가서 최소한 2시간은 리뷰를 하게 돼요. 처음엔 그게 굉장히 끔찍했는데 ‘이것도 뛰어넘어보자’ 그런 생각을 하죠.”
-‘닥터 리빙스턴’은 대사를 하며 담배를 피워야 하는 역할입니다. 이전에 담배를 끊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네, 뮤지컬 <토요일밤의 열기>를 할 때 끊었어요. 담배를 끊을 수 있으면 이 역할(20대 여성 ‘아네트’역)을 할 수 있겠다 해서 끊었다가 그 역할 끝났으니까 다시 피우죠.(웃음) 사실 건강 때문에, 나이가 만만치 않으니까 ‘담배를 한번 끊어볼까’ 생각도 했어요. 그런데 이게 담배 피우는 역할이네. 1막이 1시간20분 정도인데 그동안 7대를 피워요. 담배라는 게 이 여자의 심리상태 혹은 극적인 긴장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연습을 통해 계산을 하는 거죠. 여기서 담배를 끄는 게 좋을까, 여기서는 훅 뿜어내야 좋을까. 어떤 날은 연습하고 나면 딱 쓰러지겠더라고요.
사람들이 그런 얘기도 해요. 대충 피워라. 그런데 이 작품에서 담배는 제일 중요한 오브제입니다. 피우는 흉내만 낸다고 해서 해결될 건 아니죠. 그래서 요새는 담배 양을 늘려보고 있어요. 연습을 통해서 목청을 늘려놓듯이. 그래서 이제 담배가 맛이 없어요.(웃음)”
-학력 위조 사건에 대해 얘기해볼까요. 지난해 8월14일 홈페이지에 ‘이화여대를 다닌 적이 없다’고 고백하고 이틀 뒤인 16일 남편과 아이들이 있는 홍콩으로 출국했습니다. 그 이후 서울에 다시 돌아온 게 언제입니까.
“그 사건이 있은 후에 한 3개월 서울에 안 왔어요. 학력 문제는 제 개인적인 일이었어요. 제가 그것으로 무슨 직장을 얻었다든지, 사문서를 위조했다든지 그런 건 전혀 아니잖아요. 물론 놀란 분들은 놀라고 섭섭한 분, 속상한 분, 욕한 분들이 있었겠지만 저는 그렇게까지 난리가 날 줄은 진짜 몰랐어요.
저는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던 일과 상관없이 다일공동체에서 하는 영성수련에 들어갔고 그때 하나님이 저한테 용기를 주셨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게 세상의 눈으로 보면 그냥 불속으로 뛰어든 것이더라고요. 그런 면에서 제가 굉장히 무모해요. 앞뒤 계산이 없어요. 아픔을 감당하기 힘들어서 용기를 못냈던 건데. 그 상처를 이 나이 먹어서 스스로 꺼내 본다는 게 참 힘들더라고요. 그러나 그건 죽어서도 한이 될 것 같았어요. 죽기 전에 거짓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만은 내가 날 용서해야 되겠고….
그렇게까지 파문이 클 줄은 몰랐어요. 그게 현실이고 그게 제 모습이라면 그것도 제가 수용해야죠. 때로는 ‘그래, 내 청춘에서 지우고 싶은 기억이지만 누군들 털어서 먼지 하나 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런 위안을 갖기도 해요. 그냥 그렇게 살아요. 살아야 하니까.”
-학력 위조 사실을 밝힌 글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고백한다’고 했습니다. 사건이 지나가고 난 지금은 마음이 좀 홀가분해졌습니까.
“부끄러움의 흔적까지 없어지지는 않을 겁니다. 저에게 늘 교훈으로 남아있겠죠. 그렇지만 많이 자유로워졌어요.”
-하지만 무대를 떠나는 날까지 ‘학력 위조를 한 배우’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닐텐데요.
“상관없어요. 엄밀히 말해서 (학력은) 제 연극 인생에 아무런 상관이 없거든요. 언론이 윤석화가 이화여대를 중퇴했기 때문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저에게 더 많은 인센티브를 주었을까요? 혹은 관객이 제가 이화여대를 중퇴했기 때문에 더 많이 보러왔을까요? 글쎄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제가 (이화여대에 다니지 않았다는) 사실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으로 세상에서 받은 혜택보다는 제 상처가 더 커요. 저는 어차피 무슨 스타가 되고자하는 꿈이 요만큼도 없었어요. 단지 연극이 좋아서 연극을 했을 뿐이고.”
-힘든 시기를 넘길 때 아이들이 큰 의지가 됐을 것 같습니다. 2003년 아들 수민이, 2007년 딸 수화를 공개입양했는데요. 두 아이 모두 서울에 있습니까
“수민이는 아직 학교 갈 나이는 아닌데 홍콩에서 제일 좋다는 초등학교에 뽑혔어요. 일단 홍콩에서 아빠랑 살면서 예비학교에 다니고 있어요. 애가 없으면 너무 허전할 것 같아서 수화는 제가 데리고 있고.”
-가족이 서울과 홍콩에서 따로 살며 생이별을 하고 있네요.
“남편이 이제 한국으로 와야겠죠. 저도 일하면서 홍콩에 왔다갔다 하는 게 너무 힘들어요. 나이가 나이니만큼. 나름대로 가정에 헌신했다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남편이 저를 위해 헌신해야 할 때가 아닌가, 이런 생각도 좀 하고요. 이젠 그 사람이 한국으로 오든지, 한국으로 안 온다고 해도 이제는 자기가 왔다갔다 하고 내가 왔다갔다 하지 않게끔. 또 우리 수민이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기 전에 한국에서 최소한 1~2년은 초등학교를 다니게 하고 싶거든요. 그래야 한글이 완벽해지니까. 제가 아이를 위해 조금 더 하려면 이제는 순서가 그렇게 바뀌어야 하지 않나 생각하고 있어요.”
“저도 늙었더라고요, 이젠 후배 키우는 머슴 되렵니다”
- 남매 간에 우애는 좋은가요.
“제가 작전을 잘 세웠지요. 수화가 처음 왔을 때 수민이가 질투하지 않도록. ‘수민이의 유일한 여동생이니까 수민이가 많이 사랑해주고 잘 돌봐줘야 한다’고 얘기했어요. 대답은 그러겠다고 했는데 그래도 애니까 질투하잖아요. 그래서 저희집에 오는 모든 사람들한테 ‘언제 어디서든 둘이 있을 때는 우리 수민이 먼저 아는 척을 하라’고 말했어요. 그게 제 작전이죠.
또 일부러 수민이한테 기저귀 가져와라, 우유 가져와라 시켰어요. 그랬더니 책임감이 생겨요. 어떨 때는 우리 수화가 자다가 울면 수민이가 난리가 나요. ‘수화 우유 빨리 갖고 오라’고. 자기가 부엌에 가서 뭐든 아무거나 들고 오고.”
- 엄마가 유명한 연극배우라는 것을 아이들이 알고 있습니까.
“우리 수민이가 이제 조금 아는 것 같아요. 우리 수화는 뭐, 걔야 이제 22개월이니까. 수민이는 제 사진을 보기도 하고 사무실에도 오잖아요. 그럼 워낙 질문이 많은 애라서 엄마 무슨 일 하냐, 그건 뭐냐 물어봐요. 영국에서 뮤지컬 <맘마미아>를 보여줬는데 수민이가 그 노래를 다 불러요. 서울에 왔을 때도 영화 <맘마미아>를 같이 보러갔고요. ‘엄마가 어쩌면 <맘마미아>를 뮤지컬로 할지도 몰라’ 얘기하니까 ‘엄마도 저렇게 하는 거냐’고 물어보더라고요.”
- 선생님은 배우이지만 제작자로도 좋은 성적을 내고 있습니다. 2004년 뮤지컬 <토요일밤의 열기>를 제작했고 2008년엔 창작 뮤지컬 <사춘기>를 무대에 올려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는데요.
“연극을 사랑하는 방법을 조금 바꿔보려고요. 혹은 후배들에게 적극적인 지지를 해주고 싶다고 할까요. 제가 언제까지 무대에 서고, 언제까지 좋은 작품을 만날 수는 없잖아요. 저도 늙었더라고요. 체력이 옛날 같지도 않고. 결국은 후배들이 잘해야 하는데. 그 아이들이 작품에 대해 옳은 생각을 하고 있고 가능성도 있는데 힘이 없잖아요. 제가 손을 잡아주고 거기서 좋은 작품들이 나올 수 있다면 그게 제가 해야 하는 일이 아닌가 해서 ‘정미소 창작지원프로젝트’를 만들었습니다. 올해 네 작품을 지원하기로 했는데 에드워드 올비 작품은 라이선스 해결이 안돼서 결국 내년으로 넘어가게 됐어요. 저는 제작자라기보다는 그냥 오줌 싸면 오줌 치우고 똥 싸면 똥 치우고. 머슴이에요, 머슴.(웃음)”
- ‘설치극장 정미소’의 대표이기도 합니다. 대학로에 소극장이 많지만 자기 색깔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는 곳은 별로 없는데요. ‘정미소’는 지금까지 어떤 성격으로 운영해왔고 또 앞으로 어떻게 운영해 나갈 계획인지.
“과연 정미소를 언제까지 끌고 갈 수 있을지…. 한치 앞을 못 봅니다. 여기까지 왔다는 게 정말 신기하기도 하고요. 어찌됐든 이곳에선 가장 연극다운 연극, 지성이 녹아있는 연극을 보여주고 싶어요. 요즘 대학로에서 안타까운 게 연극이 가벼워졌고 개그화됐다는 겁니다. 어려운 연극이라고 해서 꼭 불편하고 재미없는 건 아니거든요. 어려운 것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고 그것을 즐길 수 있는 게 지성이에요. 언론이 방향을 잘 잡아줬으면 좋겠어요.
저는 뮤지컬과 정극을 오가는 배우이고 뮤지컬을 정말 사랑하지만 뮤지컬 시장이 갑자기 커지는 건 위험한 것 같습니다. 시장이 커진다고 해서 공급이 다 되는 게 아니니까 작품 질이 나빠질 수밖에 없어요. 그럴 때 손해보는 사람들은 뮤지컬을 해오던 ‘진짜’들이에요. 우리가 돌아갈 곳은 재미가 아니라 의미예요. 어려운 것을 관객들에게 잘 전달해야 한다는 게 중요한데, 그것이 우리 선수들이 해야 하는 일이겠죠.”
- 99년 공연예술 잡지인 월간 ‘객석’을 인수했습니다. 그때는 5년만 맡겠다고 했는데 여전히 편집인·발행인 자리를 지키고 있네요.
“처음에 시작할 때 ‘아무리 힘들어도 5년은 버텨라, 아무리 좋아도 5년 후엔 떠나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5년이 됐을 때 제가 떠나면 객석이 공중분해되는 겁니다. 떠날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2006년 안식년을 갖기 전에, 그게 7년 됐을 때인데 정말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야 제가 안식을 할 것 아닙니까. 때마침 괜찮은 출판사에서 인수 제의가 왔어요. 그쪽 의지가 강했기 때문에 제가 6개월을 작업을 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출판사 사장이 바뀐 겁니다. 없던 얘기가 됐죠. 그러다 1년도 안돼서 다음 사장이 왔어요. 그 사람이 ‘왜 객석을 인수 안했느냐’고 하면서 저한테 만나자고 하더군요. 그 약속이 바로 제 (학력 위조) 사건이 일어난 다음 다음날이었습니다. 제가 그때 그 분을 만날 수 있었겠습니까. 또 무산이 됐고 여기까지 온 거예요.”
- 공연예술계에는 객석만큼 꾸준히 수준있는 기사를 선보이는 잡지가 드뭅니다. 객석이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에 객석처럼 공연예술을 아우르는 저널이 하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크다고 생각합니다. 객석이 없었다면 우리는 사라 장을, 장한나를 더 늦게 발견했을지도 몰라요.
지금 모든 공연장이 명품 같은 잡지를 만들고 있는데 그건 없어져야 합니다. 그런 책은 극장 찌라시 묶어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명품지처럼 멋있게 포장만 하는 거죠. 그 공연장들이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곳이니 이건 국민의 혈세로 만드는 겁니다.
물론 공연 일정을 안내해주는 가이드라인은 필요하죠. 그러나 이런 식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잡지들은 예술의 옥석을 가려내는 데도 혼란을 줘요. 객석을 더 잘 팔기 위해서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그런 책들은 없어지고 객석 같은 책들이 2~3권 더 생겨도 괜찮습니다.”
- 요즘은 객석을 인수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습니까.
“개인은 있어요. 그런 개인은 처음에는 하죠. 그런데 지금처럼 2년 동안 적자가 난다? 그럼 문 닫아요.”
- 그렇다면 그 적자를 모두 감당했다는 뜻인데.
“저도 그게 신기해요. 내가 그 세월의 강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저는 지금까지 저를 CF에 써주신 분들께 정말 감사해요.(웃음) 그게 없었으면 객석도 ‘정미소’도 다 주저앉았을 거예요. <토요일밤의 열기>가 주저앉고 객석도 어렵던 때가 있었어요. 1주일 안에 3000만원이 마련되지 않으면 진짜 다 풍비박산이 나는 거예요. 밤새도록 기도했어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눈물이 나요. 내가 왜 예술의 중요성은 알아서 이러고 살아야 하나.
그때 제가 기도를 한 게 ‘정말 길이 없습니다, CF 하나 주시는 방법밖에 없는데 관절약 광고는 싫습니다’ 그랬어요. 관절약도 들어왔었거든요. 그런데 내가 그걸 하면 관객들이 실망할 것 같았어요.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저한테 맞는 광고를 달라’고 기도했어요. 사실 이게 말이 안되죠.
그런데 다음날 아침 대구의 어느 아파트 건설회사에서 전화가 온 겁니다. 모델을 윤석화로 결정을 했다고. 돈도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주셨어요. 그래서 위기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너무 웃기는 게, 저는 제가 했던 작품에 관한 것을 갖고 있지 않아요. 그런데 그때 그 회사에서 뭘 하나 만들어줬어요. 제가 그걸 서재에 놨다는 것 아닙니까. 정말 감사해서.”
-인수하겠다는 출판사가 없으면 앞으로도 어려운 고비가 있겠네요.
“그런 일(학력위조 사건)까지 있어서 직원들에게 너무 미안해요. 제가 떠나려는 이유는 객석이 더 잘 되길 바라기 때문이에요. 제가 객석 발행인이 아니라면 광고도 가져다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제 일이니까 그걸 못하는 거예요. 게다가 제목이 여배우니까 어디 가서 부탁을 한다는 게 좀 그렇고요. 여성으로서의 한계도 있고.”
- 배우와 제작자, 잡지발행인, 아이 엄마의 역할을 모두 해내고 있습니다. 어떤 역할이 가장 만족스럽고 행복합니까
“엄마와 배우. 월간 객석은 별개지만 제작은 저로서는 같은 선상이에요. 연극이란 같은 선상. 그래도 가능하면 그런 일은 하지 않고,좋은 제작자 만나고 좋은 연출 만나고 좋은 작품 만나서 온전히 배우만 했으면 참 좋겠어요. 꿈이 있다면 그래요. 배우하고 엄마만 했으면.”
- 이번 <신의 아그네스> 공연이 잘 돼야 컴백에 성공한 것으로 평가받을텐데.
“이렇게 관심 가져주시고 우리가 열심히 하니까 잘 되겠죠. 세상이 아무리 잘못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도 진짜는 영원하더라고요. 시간이 걸릴 뿐이고 감내해야 할 것들이 많지만. 없는 것 같아도 긍정의 눈과 마음으로 들여다보면 세상에는 희망이 있어요.”
- 여배우로서 나이 든다는 사실이 두려울 때는 없습니까.
“저는 배우로서는 나이 먹는 게 두렵지 않아요. 인간으로서도 나이먹는 게 참 좋아요. 빨리 60세가 됐으면 좋겠고. 어쩌면 제가 가지고 있는 능력이나 그릇은 요만한데 이만큼 이렇게 달려왔는지도 모르겠어요. 다만 연극이라는 게 아무리 땅을 갈아도 외로운 빈 들인 것 같아서 그게 외롭긴 해요. 그러나 연극은 제가 선택한 길이고 사랑했으니까. 그 외로움마저도 사랑해야 하는 거죠. 나이 들면서 외적으로는 심플해지고 내면은 좀더 커졌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어요.”
- 아이들이 아직 어리다는 점은 마음에 걸릴 것 같은데.
“엄마로서는 안타깝고 애들한테 미안해요. 아이를 처음 입양할 때 제일 걱정했던 것도 그거였거든요. 제가 어렸을 때 친구들 중에 자기가 큰딸인 애는 엄마가 젊잖아요. 저는 막내딸이다보니 또래인데도 친구 엄마는 서른여덟인데 저희 엄마는 쉰여덟이었어요. 그런 것을 생각하면 아이들한테 미안하죠. 20대 엄마처럼, 30대 엄마처럼 놀아주지 못할테니까.
하지만 다른 엄마가 줄 수 없는 것을 제가 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사랑일 수도 있고 지혜일 수도 있고. 저는 아이들이 아기일 때부터 무조건 대화를 했어요. 우리가 그러했듯이 아이들도 어느 순간이 되면 무엇이든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지잖아요. 전 그게 엄마이길 바라는 거예요.”
- 어떤 배우로 기억되고 싶습니까.
“저는 그런 꿈은 없어요. 그러나 가능하다면 아이들을 가장 사랑했던 엄마, 그리고 무대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배우, 이렇게 기억되면 참 좋겠어요.”
83년 연극 ‘신의 아그네스’로 유명세…월간 ‘객석’ 인수 경영자로도 두각
연극배우 윤석화는 1956년 1남6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75년 민중극단 <꿀맛>으로 데뷔했고 83년 연극 <신의 아그네스>에서 주연 ‘아그네스’ 역할을 맡으면서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84·89·96년 백상예술대상 여자연기상을 수상했고 연출가협회 선정 올해의 배우상(92년), 한국뮤지컬대상 연출상(2004년)을 수상하는 등 배우이자 제작자로서 실력을 인정받았다.
99년 공연예술잡지인 월간 ‘객석’을 인수했고 2002년 ‘설치극장 정미소’를 열면서 경영자로도 두각을 드러냈다. 2003년 아들 수민이를 공개 입양했고 2005년 입양활성화 등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2007년 딸 수화도 입양으로 얻었다.
2007년 신정아 전 동국대 교수의 가짜 학위 논란이 일던 시기, 홈페이지에 스스로 ‘이화여대를 다닌 적이 없다’고 밝혀 학력위조 파문에 휘말렸다. 이후 아이들과 함께 홍콩에서 지내다 서울로 돌아왔다. 12월6일 복귀작 <신의 아그네스>를 ‘정미소’ 무대에 올릴 계획이다.
<글 최희진기자·사진 김세구 선임기자 dais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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