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이 한창이던 작년 말, 정치인들의 발언과 약속을 검증하는 사이트인 ‘폴리티팩트’는 트럼프의 진술 중 70% 이상에 거짓이 묻어있으며 이는 클린턴의 3배에 해당한다고 밝힌 바 있다. 비슷한 시기, 미국인들 중 다수가 트럼프가 클린턴보다 정직하고 신뢰할 만한 후보라 믿는다는 설문조사 결과가 나왔다. 사실을 경시하는 후보를 더 신뢰하는 역설적인 상황. 정작 트럼프는 미국의 전통적인 주류 언론들을 ‘가짜뉴스’라고 폄훼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한 보수 인사는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세계 유수의 석학들이 한국의 탄핵 실패를 예견했다”면서 “이들은 박근혜 대통령이 다시 복귀할 것으로 판단한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그러나 그가 인용한 ‘기사’는 누군가가 장난삼아 써서 유통시킨 가짜였다. 비슷한 사례는 끝이 없다. 미 대선 중 교황이 트럼프를 지지한다거나 클린턴이 이슬람국가(IS)에 무기를 팔았다는 뉴스가 유포되었다. 백과사전을 표방하는 우리나라의 ‘위키’ 사이트들은 엉뚱한 ‘의견’을 ‘사실’로 만들곤 한다. ‘팩트’를 신성시한다는 사이트 이용자들은 감성적 주장이나 이죽거림을 ‘팩트폭력’이라며 칭송한다.
2016년을 보내면서, 옥스퍼드 사전은 ‘포스트-진실(post-truth)’을 올해의 단어로 선정했다. 객관적 사실보다 감정이나 개인적 신념이 여론 형성에 더 영향을 미치는 상황을 의미한다. 사실 ‘포스트’라는 접두어는 수식 대상의 본질적 의미를 일부 계승하되 그 한계를 극복할 때 사용된다. 하지만 옥스퍼드 사전 대표 그래스월은 여기서의 ‘포스트’가 “무의미한”을 뜻한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이 포스트-진실의 시대란 ‘탈(脫)진실’보다는 ‘비(非)진실’에 가까운 것일까?
가짜뉴스가 난무하는 현상을 정치적 상황이나 소셜미디어의 확산만으로 설명하는 것은 부족하다. 사진은 사실 여부를 가리는 중요한 증거로 작동했지만 언젠가부터 사진적 증거는 합성과 조작이라는 혐의를 먼저 받게 되었다. 사람들은 한 사건을 본 두 기자의 기사도 소속 언론사의 성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다.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객관적 진실은 이상으로만 남은 시대가 된 것이다. 500여년 전 합리성이 신을 대체하기 시작했듯, 이제 감성이 합리성을 대체하는 모습을 목격 중이다.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경합하는 진실들을 중재하는 기제이다. 그 첫 번째 요소는 책임감 있는 언론이다. 언론은 진실(truth)이 여러 개라는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사실(fact)을 분명하게 밝히는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 포스트-진실 시대 언론의 역할이다. 가짜뉴스는 언론이 기각된 세계에서 횡행한다. 독자들이 좋아하는 대로 적당히 부풀려 써갈긴 연예기사들이 쌓여 사건기사의 신뢰도를 갉아먹었다. 스폰서를 밀어주는 홍보성 산업기사들이 쌓여 공 들인 경제 분석기사의 가치를 훼손했다. 가짜뉴스의 확산에는 기존 언론의 책임이 막대하다.
기술적 개입도 중요한 요소이다. 페이스북은 독일에서 ‘코렉티브’로 명명된 가짜뉴스 판별 시스템을 도입했다. 프랑스 대선을 앞두고는 온라인 허위 뉴스 근절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특정 사이트에 대한 광고 판매를 차단함으로써 가짜뉴스 사이트의 수익구조를 와해시키는 대책도 강구하고 있다. 텍사스 주립대학은 기사의 문장구조나 단어들이 사실관계와 제대로 조응하는지 실시간으로 판별하는 ‘주장파괴자(ClaimBuster)’라는 이름의 시스템을 개발 중이다.
하지만 포스트-진실 시대에 생존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비판적 사고’다. 스노든은 “가짜뉴스의 문제는 영웅적 심판의 등장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며, 시민들이 비판적이고 참여적 시각으로 정보에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 공영 라디오방송인 NPR도 정보의 사실 여부를 체크하는 방법들을 제안한 바 있는데, 그 대전제는 각자 ‘약간의 시간을 할애할 용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평소 의심하던 바를 해소해줘서 무릎을 치게 만드는 뉴스가 있다면, 자기 내면에서 나오는 “진짜?”라는 질문을 존중하고, 더 많은 관련 정보들을 찾아보라는 것이다.
포스트-진실 시대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만을 믿으려 한다.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도 ‘즉각적 반응과 즉각적 망각’으로 바뀌었다. 이 변화는 수백년에 걸친 문화적 변용이기도 하기 때문에 마냥 한탄하거나 욕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실의 모호함을 사실의 왜곡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포스트-진실의 시대라 하더라도 혹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언론은 더 자기 역할을 해야 하고 시민들은 비판적이 되어야 한다. NPR의 제안처럼, 피를 끓게 만드는 뉴스는 오히려 가짜 정보일 수 있다는 일종의 경고이기 때문이다.
윤태진 |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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