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일 경향신문 지면기사입니다-
이런 경우를 한번 상상해보자. 나는 교과서를 만드는 사람이다. 나름 똑똑한 연구자들을 모아 교과서 집필을 시작했다. 그런데 말을 안 듣는 이들을 중간에 내쫓다보니 완성품이 영 시원찮다. 그래도 객관적인 평가를 받고 싶은 욕심에 전문가에게 심사를 부탁했다. 아니나 다를까, 학생들에게 차마 읽힐 수 없을 지경이라는 성적표를 받았다. 기분 나쁘다. 성적표를 마음대로 수정했다. 싫은 소리는 빼고 칭찬을 몇 개 새로 넣었다. 내 기분은 나아졌는데, 심사자는 화를 낸다. 서명하지 못하겠단다. 그냥 집어치우기로 했다. 외부 평가를 받은 적이 없다고 우기면서, 엉터리 교과서를 아무 손질도 없이 전국의 고등학교에 뿌리기로 했다. 학생들이 엉뚱한 내용을 배워 바보가 돼도 할 수 없다. 심사결과를 알려서 망신을 당하는 편보다는 훨씬 낫다.
MBC를 관리·감독할 의무가 있는 방문진(방송문화진흥회)이 외부 전문가가 작성한 ‘경영평가보고서’를 폐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위 사례의 ‘나’와 다른 점은, 외부 평가가 법률에 의해 의무화된 작업이라는 사실, 그리고 16년째 해오는 동안 이런 일은 처음이라는 사실이다. 외부 비판을 무시하고 불량상품(방송)을 만들어 전국에 뿌리고 있다는 점은 비슷하다. 제 삼자로부터 객관적이고 전문적인 평가를 받고 그 결과를 공표하는 것은 공영방송의 책무이다. 그 평가과정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당위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다. 자신을 평가해달라고 부탁해놓고, 성적이 나쁘다고 내 맘대로 성적표를 고친 다음 서명만 해달라는 요구가 상식적인가?
몇 년 전 유사한 심사작업을 수행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심사작업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소요되는지 잘 안다. 그러나 그 결과물이 폐기될 때의 심정은 차마 짐작하기 어렵다. 평가를 의뢰한 이들이 보고서의 핵심적인 내용을 엎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초고가 제출되면, 사실관계 오류나 적절하지 않은 표현 몇 개에 대한 수정 부탁이 있을 뿐이다. MBC 보고서 폐기사건을 지켜보면서 참담함을 느끼는 가장 큰 이유는 방문진 다수파 이사들의 행태가 너무도 비인간적이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애써 탈고했을지 충분히 상상이 되는 초고를 앞에 놓고 “심사자가 (직접) 작성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모욕적인 발언을 하고, 심사자를 불러낸 자리에 학계 선배를 동석하게 하여 심리적 압박을 하고, 시작할 때는 “연구자의 권위와 학문적 자유를 존중한다”고 하다가 초고가 나오니 “보완을 요청할 수 있다”는 계약서 문구를 무한 확대해석하는 모습들 말이다. 호의적인 내용이 많았던 작년의 보고서에 대해 비판이 자자했을 때는 “독립적으로 전문가들이 평가한 결과”임을 강조하며 ‘정파적’ 비판을 하지 말라고 소리 높이던 사람들이다.
“공정방송의 의무는 근로관계의 기초를 형성하는 원칙”이라는 대법원의 판결, 그리고 MBC가 (수십억원의 수임료를 낭비하며) 노조를 상대로 50개 이상의 소송을 벌이면서 정작 승소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는 점은 모두 중요한 사실들이다. 심사자가 “MBC는 보다 전향적인 자세로 노사관계의 변화를 꾀해야 한다”고 쓸 수 있었던 근거들이다. 이 구절을 임의 삭제했다. 지난 5년, MBC는 공신력 있는 각종 기관이 조사하는 언론사 평판조사에서 일관되게 급전직하했다. 방문진은 MBC가 조사를 의뢰해서 얻은 호의적 결과 하나를 임의로 추가했다. “비리 고발이나 심층 탐사가 부족하다”는 심사자의 평가를 방문진은 ‘생활밀착형 성찰’을 강조했다고 임의 수정했다. 모두 정당한 ‘보완’작업으로 보이는가?
이틀 전 고용노동부는 김장겸 MBC 사장 등 전·현직 고위 임원 6명을 부당노동행위 혐의로 검찰에 기소 의견 송치했다. 사측에 반기를 든 기자, PD, 아나운서들에게 스케이트장이나 주차장 관리 업무를 맡기고, 노조 탈퇴를 종용하거나 근로기준법상 한도 초과의 연장근로를 지시한 등의 혐의이다. MBC는 ‘편파수사’이며 ‘언론탄압’이라고 주장한다. 정말 그런가? 유능한 인력들을 증거없이 해고한 것만 한 편파수사가 없고, 열심히 취재하고 만든 프로그램을 임원들이 깔아뭉갠 것만 한 언론탄압이 없다.
방문진은 방송문화진흥회법 제5조에 따라 MBC를 관리·감독할 의무가 있다. 부당노동행위의 주도자들을 징계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런데 ‘경영평가보고서’를 폐기하는 작태를 보건대 주어진 소임을 다하는 것은 무망해 보인다. 그렇다면 동법 제6조에 따라 방문진 이사들의 임면권을 갖는 방송통신위원회가 개입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먼지만큼의 양심과 책임감이 남아있다면, 방문진 이사들은 ‘할 일’을 깔끔하게 한 다음 조용히 물러나야 한다. 박수를 받으며 떠날 수 있는 시간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
<윤태진 |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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