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군 불온서적 지정’ 반대… 헌법소원 냈다 파면된 지영준 前 법무관
지영준 전 법무관(39)은 2000년 군법무관 임용시험에 합격했을 때 “절대 전역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사법고시를 함께 준비하던 친구들은 ‘사시를 포기하고 군법무관이 되느니 차라리 대학원에 진학하라’며 그를 말렸다. 하지만 그는 “군에도 의미 있는 일이 많을 것”이라며 주변을 설득했고 단 한 번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세상사는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전역하지 않겠다던 지 전 법무관은 지난 3월17일 파면 처분을 받고 군에서 제적당했다. 2008년 7월 국방부가 책 23권을 불온서적으로 지정한 것에 대해 같은해 10월 헌법 소원을 제기한 것이 징계의 이유였다.
(헌법소원을 냈던 군법무관 7명 중 2명은 소를 취하했고 3명은 경징계, 지 전 법무관을 포함한 2명은 파면 처분을 받았다.)
지 전 법무관은 지난 4월 파면처분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했으나 법원은 이를 기각했다. 지금 그는 헌법소원과 징계처분 취소 청구소송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장기 복무를 하는 군법무관이 10년을 채우지 못하고 전역할 경우엔 변호사 자격증이 없다.
이제 군인도 변호사도 아닌 지 전 법무관을 지난 26일 만났다. 그는 “후배들이 군법무관이란 직업에 자부심을 갖길 바라는 마음에서 헌법소원을 취하하지 않았다”면서도 “고생하는 가족들과 불안해 하는 후배들한테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불온서적 지정에 대해서는 “국방부가 군인들의 수준을 얕잡아 보는 것 같아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며 “군의 역사가 20년 전으로 퇴행한 것 같아 안타까운 심정”이라고 했다.
- 처음 헌법소원을 할 때 일이 이렇게 커질 줄 알았습니까.
“군법무관이 된 후에 헌법소원을 많이 해봤지만 징계를 받은 적은 없었습니다. 이번 일에 대해서도 제가 아는 선배님들은 ‘사유가 없는데 어떻게 파면하나, 징계는 말이 안되는 소리’라고 했어요. 그런데 이건 아주 건전한 상식을 가진 사람들의 생각에 불과했던 거죠(웃음).”
- 지난 3월 파면된 후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합니다.
“일단 집은 계룡대의 군인 아파트에서 계속 살고 있습니다. 징계가 나온 직후엔 아파트에서 나가라고 할까봐 마음을 졸였어요. 그런데 파면처분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 소송을 할 때 국방부가 ‘아파트에서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취지로 변론을 하더라고요. 제가 아파트에서 쫓겨나서 갈 데가 없어지면 파면의 효력을 정지해야 할 사유가 생기니까 그랬던 것 같아요. 덕분에 군인도 아닌데 군인 아파트에서 살고 있습니다(웃음).
파면당하고 첫 2주 정도는 건강보험도 걱정이었어요. 아이한테 감기 기운이 있었는데 보험이 안될까봐 병원에 못 가겠더라고요. 몇 번이나 병원 문 앞까지 아이를 데리고 갔다가 다시 오기를 반복했습니다. 파면 결정이 나고 한 달쯤 지나니까 직장 보험에서 지역 보험으로 넘어갔다고 연락이 와서 다행히 한숨 돌렸어요.”
- 가족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가족들한테 가장 미안하죠. 저와 친한 사람들은 중징계가 나올 것을 직감으로 느꼈다고 해요. 계속 ‘헌법소원을 취하하라’고 했었죠. 파면당하고 2~3주 후에 국방부에서 항고심할 때도 ‘지금이라도 취하하라’고 했고요. 그런 얘기를 들었을 때 제일 먼저 생각난 게 가족이었어요. 고민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만약 당신이 취하한다면 내가 믿어왔고 멋있다고 생각했던 그 남자가 아니다’라고 하더라고요. 돈을 벌어오는 사람이 없어 힘들긴 하지만 가족이 잘 버텨줘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지난해 10월의 헌법소원은 군 내부에서부터 국방부 방침에 이의를 제기한 것이라 이목을 끌었습니다. 헌법소원을 하기로 결심했던 배경은 무엇이었습니까.
“국방부가 지난해 7월 책 23권을 불온서적으로 지정하면서 제시했던 근거는 기무사의 내부 문서였습니다. ‘한총련이 군대에 도서 보내기 운동을 한다’는 첩보를 바탕으로 작성한 문건이에요. 지난해 7월쯤에 수집한 첩보(평가 및 처리되지 않은 자료, 즉 정보로서의 가치가 입증되기 이전의 자료)라고 하는데, 문제는 이것이 2~3개월이 흐른 9, 10월까지도 계속 첩보에 불과했다는 겁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불온서적 지정을 재검토하라’고 한 것이 지난해 8월27일이었고 그 후로도 기무사 문건 외에 다른 근거가 없다면 국방부가 방침을 바꾸는 게 맞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이상희 국방부 장관은 10월 초 국회 국정감사에 출석해 불온서적 지정을 유지하겠다고 했잖아요. 너무 이상한 일 아닙니까. 그때부터 헌법소원을 준비한 겁니다.”
- 불온서적을 지정한 이후 실제로 국방부가 군을 단속한 적이 있습니까.
“이런 얘기는 하기 좀 그렇지만 불온서적을 지정했는지 모르는 지휘관들도 많았어요. 그만큼 무관심했죠. 그러니까 제대로 단속이 되겠습니까. 몇 군데 단속을 하기는 했는데 외부에서 들어온 것은 한 권도 안나왔어요. 원래 있던 책들만 수거했죠. 한홍구 교수의 <대한민국사> 같은 책들은 군에서도 볼 수 있게 이미 들어와 있었거든요.
사실 저는 국방부의 불온서적 지정을 보면서 자존심이 많이 상했습니다. 제가 지난해 헌법 공부를 하면서 고민했던 게, ‘국군 조직이 과연 행정기관인가’ 하는 문제였어요. 국방부는 군을 하부 조직인 것처럼 여기고 있는데 국방부와 육·해·공군은 상하 관계라고 보기 어려워요. 군 통수권은 대통령에게 있고 군은 국방부 장관이 있기 전에 존재하는 조직 아닙니까. 국방부 장관은 대통령의 통수권을 보좌하는 기관이고요. 국방부-군의 관계는 법무부-검찰의 관계와는 다르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국방부가 불온서적을 지정한다면 국방부 직원들이나 못 읽게 하면 되는 거예요. 더욱이 국방부는 장병들한테 그 책들을 읽지 말라고 했는데, 장병이면 장교와 병사입니다. 장성들도 읽지 말라는 얘기예요. 국방부가 군인들의 수준을 얕잡아 본 거죠.”
- 참여정부에서 이명박 정부로 정권이 바뀐 뒤 군 내부 분위기는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예를 들면 지휘관들이 부하들한테 얼차려를 준다면서 주말에 집에 보내지 않고 부대에 남길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법무관한테 물어본다고요. ‘주말에 집에 안보내면 인권 침해라고 하지 않겠냐’고. 이게 불과 2~3년 전의 일이에요.
2007년에는 군인복무기본법도 제정하려고 했습니다. 대통령령으로 돼 있는 군인복무규율을 법률로 바꾸는 작업이었죠. 군인복무규율에 ‘불온표현물 소지·전파 등의 금지’를 규정한 조항이 있는데 법무관들이 이 부분은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실제로 법안에서 삭제했습니다. 전기통신사업법에 관한 것이긴 했지만 헌법재판소가 ‘불온’이라는 표현 자체에 대해 위헌 결정을 했고, 법무관들도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불온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느냐고 생각했기 때문에 뺐던 거죠.
이런 공감대가 2007년까지는 형성돼 있었어요. 그래서 저희 법무관들도 불온표현물 조항은 사문화됐다고 믿었는데 2008년 이 조항을 근거로 불온서적이 지정된 겁니다. 상황이 이러니 ‘사회가 20년 전으로 후퇴한 것 같다, 군이 하나회 해체 이전으로 돌아간 것 같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거죠.”
- 이 사건이 있기 전까지 직업 군인으로서 군법무관은 일반인들에게 조금 생소한 직종이었습니다. 어떻게 군법무관이 됐습니까.
“사실 저도 군법무관이 무엇인지 몰랐어요. 1999년 사법시험 2차 시험에서 낙방한 것이 군법무관 임용시험에 응시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당시 저는 가난한 농민의 아들이라 ‘헝그리 정신’으로 물만 마시면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시험에 떨어지니까 생계가 막막하잖아요. 같이 사시를 준비하다가 먼저 합격한 친구들 7명이 매달 돈을 모아서 주더라고요. 사법연수원 월급이 70만원 정도밖에 안되는데도 말이죠. 제가 사시에 다시 도전한다면 최소한 2년은 걸릴텐데, 친구들한테 2년이나 더 생활비를 받아 쓴다는 게 미안했어요. 그래서 2000년 군법무관 시험을 본 겁니다. 친구들한테 졌던 그 빚 때문에 저는 절대 전역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어요. 군법무관으로서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게 빚을 갚는 것이라고 생각했었고요.”
- 그렇다면 파면될 수 있다는 얘기가 들려올 때 헌법소원을 취하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불의를 보더라도 한 번만 참으면 인생이 순탄해지지 않습니까.
“참을 줄 알았으면 벌써 훌륭한 사람이 됐을 겁니다(웃음). 헌법소원을 했던 7명 중에서 공군법무관 1명과 육군법무관 1명이 취하했는데 공군법무관은 공군에선 혼자였으니까 회유를 많이 받은 것 같아요. 육군법무관은 제가 파면당한 이튿날 열린 징계위원회에 들어갔는데 ‘취하하면 용서해주겠다’는 말을 듣고 취하했다고 하더군요.”
- 지 전 법무관의 파면은 일종의 ‘시범 케이스’가 아니었나 하는 의문이 듭니다. 다른 법무관들한테 ‘상부에 문제를 제기하면 파면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심어줬을테니 말입니다.
“저는 후배들이 군법무관이란 직업에 자부심을 갖고 더 강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헌법소원을 취하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파면되면서 오히려 후배들의 불안감이 커졌어요. 자신들도 파면될 수 있다는 걱정 탓에 순종적으로 변하는 거죠. 불온서적 외에도 후배들과 준비하고 있던 헌법소원이 있는데 이번 일로 후배들이 많이 흔들리는 것 같습니다. 강했던 후배들인데 겁을 먹고 주저하는 모습을 보니 눈물이 나더라고요. 후배들한테는 미안한 마음뿐입니다.”
- 지난 4월 서울행정법원에 징계처분 취소 소송을 청구했습니다만 판결이 나오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입니다. 생계를 어떻게 이어갈지 걱정이 많겠습니다.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가장 쉬운 게 법무법인에서 사무직원으로 일하는 건데 법률상으로 불가능합니다. 변호사법에 파면 징계를 받은 사람은 법무법인에서 5년 동안 채용하지 못하게 되어 있거든요. 어제는 밭에 나가서 콩을 심고 오늘 아침엔 꿀을 땄는데 농사를 짓든, 벌을 치든 다른 일을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웃음). 군법무관 14기 동기들이 희망성금을 모아줘서 일단 걱정은 덜었어요. 자기네들이 전역하는 2011년 3월까지 매달 10만원씩 갹출해 저를 도와줄 계획이랍니다.”
- 이번 일로 잃은 게 많겠지만 혹시 얻은 것도 있습니까.
“얻은 것은 별로 없지만 이런 건 있는 것 같아요. 동기들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이 전화를 해주시더라고요. 서울중앙지검 공안부의 아는 검사가 저한테 전화해서 하는 말이, ‘헌법소원은 자유민주주의적 기본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국민들에게 보장된 권리다, 이 권리를 행사했다는 이유로 파면한다면 이것은 공안 사건이다’라고 하더군요. 자기가 관할권만 있으면 공안 사건으로 입건하겠대요(웃음). 저를 응원하는 분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는 게 소득이라면 소득입니다.”
- 시민들 중에도 지 전 법무관을 지지하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겁니다.
“제가 한 일을 좋게 평가하시는 분들이 있겠지만 그런 분들이 아직은 소수인 것 같습니다. 대다수는 여전히 ‘군에서 그런 책들을 제한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소수가 다수로 늘어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소수일지라도 이번 사건을 정확하게 알고 군대의 이런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면 5년 뒤, 10년 뒤엔 우리 군도 많이 달라질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글 최희진·사진 김영민기자 dais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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