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 일가에 대한 수사는 결국 삼성의 앓던 이를 시원하게 뽑아주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대법원은 지난 5월29일 경영권 편법 승계와 관련해 배임 혐의로 기소된 이 전 회장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에버랜드 전환사채를 저가 발행한 혐의로 1, 2심에서 유죄가 선고됐던 허태학, 박노빈 전 에버랜드 대표도 무죄 판결을 받았다. 삼성 경영권 승계의 걸림돌이었던 에버랜드 문제가 일거에 해결된 것이다.
한국 사회를 들썩이게 했던 삼성의 첫 내부고발자 김용철 변호사(51)를 지난 3일 서울 용산에서 만났다. 용산 참사 현장에서 농성 중인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신부들을 보기 위해 나선 길이라고 했다. 김 변호사는 “이번 판결로 삼성의 지배 권력이 더욱 공고해졌다”며 법원과 검찰을 비판했다.
- 용산에 자주 들르십니까.
“신부님들이 계시니까 자주 오려고 노력은 하는데 몇 번밖에 못 왔어요. 저녁엔 빵집에서 일하느라 못 오고, 늦게까지 일하다보니 아침 일찍 일어나서 용산에 오기도 어렵고요.”
- 경기 부천시에서 빵집을 운영하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원래 집사람이 하던 건데 개업한 지는 몇 년 됐어요. 저는 가보지도 않다가 요즘엔 인건비도 아낄 겸 직접 챙기고 있습니다. 지난해 6월 서초동에 변호사 사무실을 내긴 했는데 사건이 전혀 들어오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사무실은 바로 접었죠.”
- 한 달 전 대법원이 이 전 회장 사건을 무죄 취지로 파기 환송했습니다. 어떻게 보셨습니까.
“저는 상징적으로라도 대법원이 유죄를 선고할 줄 알았습니다. ‘경제에 기여한 공을 감안한다’면서 형은 가볍게 주더라도 말이죠. 그런데 무죄예요. 삼성은 영속 불변의 최대 권력 체계 아닙니까. 법원이 삼성의 지배 권력을 더욱 공고하게 해준 겁니다. 애당초 특검의 수사 결과부터 납득이 가지 않았어요. 특검은 삼성의 행태에 대해 ‘장기적으로 기업에 내재된 관행이기 때문에 가볍게 처벌한다’는 논리를 폈는데, 장기적으로 내재된 문제라면 구조적이고 고질적인 범죄란 얘기잖아요. 그럼 엄벌하는 게 맞는데 장기화된 관행이므로 넘어간다고 하니 얼마나 황당한 이야기입니까.”
- 2007년 사제단과 함께 기자회견을 할 당시, 사건이 이처럼 용두사미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까.
“수사라는 건 의지의 표현이에요. 수사를 하려면 의지가 있어야 하는데 (검찰과 특검은) 의지가 없었어요. 느낌이 이상하다 싶었는데 정말 노골적으로 다 덮어버리더군요. 검찰이 몇 년 동안 수사했던 에버랜드 사건이나 기소하고. 그나마 대법원이 6대 5로 무죄를 선고했잖아요. 더 답답한 것은, 대법관이 아니라 대법원 방호원도 해서는 안되는 분(신영철 대법관)까지 무죄에 한 표를 행사했다는 겁니다.”
- 대한민국에 삼성을 수사할 수 있는 법조인은 없는 것 아닐까요.
“그렇죠. 특검이 수사 결과를 발표하니까 검찰총장이 ‘수사 끝났다’고 했잖아요. ‘이건희는 수사 못한다’는 얘기예요. 우리나라 검찰, 얼마나 대단합니까. 전직 대통령도 수사하고, 현직 대통령 아들도 구속하잖아요. 그런데 한 사람에 대해서는 못한다는 거예요. 심지어 삼성한테서 뇌물받은 검사들 이름이 나오던 당시에 검찰총장이 대검 검사들에게 ‘여기 삼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 기운 내라’고 했답니다. 참 한심한 얘기죠.”
- 사실 검찰의 조직 문화에는 외부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가령 법원은 중대 사안이 발생했을 때 젊은 판사들이 회의를 열고 제 목소리를 내는 반면, 검찰에선 그런 자정 노력을 보기 어렵습니다.
“기본적으로 검찰은 행정부의 외청이에요. 인사권이 대통령한테 있어서 검찰총장이나 서울의 지검장 등 주요 보직을 전부 대통령이 정해요. 즉 검찰은 정권의 칼인 겁니다. 지배권력을 위해서 복종하게 돼 있어요. 국민의 입장보다는 통치자의 입장으로 더 기울고, 공공의 안녕보다는 자신의 진급과 영달에 관심이 더 많아요.
아무리 정의로운 검사라도 인사에서 힘없는 자리, 장래가 없는 자리로 두 번만 밀려나면 기운이 빠집니다. 한 번 뒤처진 경력은 세상이 바뀌지 않는 한 회복하기 어려운 조직이 검찰이거든요.”
- 김 변호사는 삼성의 내부 비리를 고발하면서 ‘나와 가족의 운명을 걸고 시작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습니까.
“공론화를 목표로 삼았는데 일단 공론화는 성공했어요.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이 될지 아닐지는 아직 판단하기 이르다고 봅니다. 저를 배신자라고 한다든지 비난이 있을 거라는 건 감수했던 부분이에요. 변호인으로서 의뢰인의 비밀을 지키지 못했다고 손가락질하는데, 삼성의 모든 비리가 제가 보호해야 할 비밀은 아니지 않습니까.”
- 앞으로도 삼성과 관련한 활동을 계속할 것인지 궁금합니다.
“제가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개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 그 후의 일은 국가와 사회 시스템의 문제잖아요. 사법기관도 있고 금융감독기관도 있고 특검도 있었어요. 이들 국가기관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지금과 같은 결과가 나왔다면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삼성 문제를 척결하는 게 인생을 걸 만한 일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냄새 나는 것을 덮고 지나갈 수는 없죠. 이번 수사와 재판은 정상적 사법 절차를 통해서는 삼성 문제를 해결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줬습니다. 그럼 어떤 방식이 있을까요. 정말 고민스러운 부분이에요. 현재로서는 기회를 기다리는 것 외엔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글 최희진·사진 남호진기자 dais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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