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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칼럼+옴부즈만

‘타블로 사태’, 불공정 사회의 고비용

반이정 미술평론가

 
올 광주 비엔날레에는 9·11 테러 이튿날 각국 주요 일간지 1면들로 전시장 사방을 채운 설치물이 있다. 꽤 볼만하다. 
9·11의 여파로 그 무렵 영화계가 불황이었다는 풍문이 돌았었다. 왜냐하면 매스컴이 전 세계에 실시간 송출한 테러 순간의 비현실성과 구경거리가 영화예술의 수준을 능가해서라나. 
군중이란 불행 앞에선 탄식해도 불행이 초래한 ‘강 건너 불구경’의 관음증은 못 피하는 법! 미디어로 반복 재생된 민항기와 건물의 충돌 장면은 시청(혹은 관음)을 유도했다.

2001년 9월11일 한낮이라는 엄연한 현실 위로, 민항기 두 대가 고층건물 두 동을 주저앉히는 영화적 비현실성이 드리운다. 이것을 추동한 힘은 고작 특정 개인들의 충정어린 집단 맹신이었다. 
6000명 이상의 희생자를 낸 테러범들은 추종자로부터 ‘순교자’로 예우되었다. 테러범의 자기 확신과 의협심이 사상 초대형 사고와 직결된다. 9·11 테러범의 심리 저변에는 제도 종교인 이슬람 교리를 왜곡시켜 해석하려는 자기 확신의 버팀목이 있다. 

종교라는 방패 없이도 맹종은 왕왕 활개치며 세상을 들었다 놓기 일쑤다. 
집단 맹목성은 유사 종교적이다. 2005년 논문 조작이 밝혀진 황우석의 열성 신봉자 그룹은 정부 발표나 <사이언스>의 황씨 논문 직권 취소 이후로도 수년간 지지와 신뢰를 이어갔다. 이즈음 되면 황우석의 논문조작 사실을 이들에게 설득하는 건 불가능해진다.

일각에서 제기된 가수 타블로의 학력조작 의혹은 범국민적 관심사가 결코 아니었다. 

출발은 그랬다. 

고학력사회의 집단 열등의식, 대중 연예인이라는 만만한 표적, 거기에 진실규명이라는 선의의 명분까지 더해지자 사태는 국제적 조롱거리 수준으로 부풀었다. 타블로는 자신의 곤경을 “현실이 아닌 인터넷 아바타가 된 심정”이라고 털어놨다. 

현실 속에 비현실성과 구경거리를 결합시킨 무언가가 던져지면, 대중의 관음 욕구는 이성 판단과 경합한다. 집단지성의 매개로 상찬된 인터넷은 이 사태처럼 때론 집단비지성의 소굴로 돌변한다. 학력의혹을 제기한 <타진요> 카페 내부에서 결정적 증거랍시고 집요하게 제시된 허술한 맹종들이 웅장한 농간의 우상을 세웠다.




 

미국 현지 취재로 타블로의 학위를 입증한 2회 분량의 공중파 르포와 경찰 수사 발표조차 (예상대로) 타진요 열성회원들의 결집만 부추겼다. 수개월간 정의와 진실의 이름으로 애먼 개인의 삶을 파괴하고 불특정다수를 농간한 죄값을 고스란히 감당하긴 두려웠을 게다. 

어디서 많이 본 광경 아닌가? 복면과 모자이크 편집 뒤로 얼굴을 가린 채, 공개된 개인을 맹공하던 타진요의 보무당당함. 은폐된 신분 뒤에서 성전을 선포하는 테러분자의 단호함과 다른 게 뭔가? 일선 학교 왕따 문제에 가해자(들)는 피해자의 처지로 전이되지 못한다. 급기야 괴롭힘의 정당성까지 늘어놓을 정도란다.

<뉴스위크>(10월4일자)는 온라인 괴롭힘(사이버불링 cyberbullying)으로 몸살앓는 미국사회를 진단했다. 온라인 괴롭힘의 출발도 사소한 루머에서 시작한다. 전산화로 재편된 오늘날 일상 속의 신종 범죄여서 주정부의 대처도 더디다. 과도기적 부작용이랄까. 

해외 사례와 국내 ‘타블로-타진요’사건 사이의 차이점은 온라인 괴롭힘의 가담자가 미성년이 아닌 성인이란 점이다. 타진요 열성회원에게 타블로의 학력을 입증할 수단이 현재로선 존재하지 않는다. ‘믿음을 믿기로 작정’했으므로. 
이 자들에게 엄벌이 능사는 아닐진대, 책임자들은 처벌하되 심리치료를 병행했으면 한다. 사법적 범법자이자 병리적 환자이기에. 불공정 사회가 지불해야 할 비용, 과히 크고 요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