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500회 맞은 계명대 ‘목요철학 세미나’
“축하합니다. 그리고 부럽습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축하 인사를 하려고 연단에 오른 경북대 인문대학장 김영기 교수가 운을 뗐다. “오늘(9일)은 대구 상공에 문기(文氣)가 가득한 날입니다.”
찬사로서 지나침이 없었다. 이날은 1980년 시작된 대구 계명대의 ‘목요철학세미나(목철)’가 500회를 맞는 날이었다. 세상 돌아가는 사정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인문학의 위기’를 말하는 시대다. 2001년엔 어느 대학이 철학과를 폐지하는 일도 있었다. 학과도 존립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교수들이 주관하는 자율적인 철학 세미나가 쉼없이 달려 500회를 돌파했다는 것은 전례 없는 사건이다.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가 지난 9일 대구 계명대 목요철학세미나 500회 특집행사에서 강연하고 있다. |영남일보 제공
계명대 철학부는 이날 오후 1시부터 성서캠퍼스 교수학습지원센터에서 목철 500회 특집 행사를 개최했다. 28년 전 첫번째 세미나에서 주제 발표와 토론을 맡았던 원로 교수들이 같은 주제로 다시 토론하기 위해 학교를 찾았다. 이웃 대학의 교수들도 기념일을 축하하고자 시간을 냈다. 지나간 500회를 회고하고, 앞으로 치러낼 또 다른 500회를 다짐하는 자리였다.
시대와 함께한 ‘목철’
지금 목철 세미나는 지역 주민들에게 열려있지만 본래 출발점은 계명대 철학과 교수들의 공부 모임이었다. 교수들은 1주일에 한번씩 모여 4시간씩 토론하며 학문적 자극을 주고 받았다. 모임이 내실있게 굴러가자 주변에서 관심을 보였다. 지역에 마땅한 문화 행사가 없으니 아예 공개 세미나로 운영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도 있었다. 이에 김영진 교수와 백승균·변규룡·임수무 교수, 고 하기락 교수 등은 80년 10월8일 ‘아가페와 자비’라는 주제로 제1회 공개 강좌를 개최했다. 목철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현재 목철을 주관하고 있는 박상혁 철학부 교수는 “당시는 군부독재 치하였지만 목철에선 마르크스를 논하는 게 허용됐다”며 “목철 안에서 별별 논쟁이 다 벌어졌고, 대학 안팎의 호응도 폭발적이었다”고 말했다.
목철은 ‘그 어렵다는’ 철학 세미나였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고담준론에 머물지 않았다. 시대와 함께 고뇌하고 사유했다. 실제로 그간 목철의 강연 목록을 살펴보면 시의성을 담아내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예를 들어 2002년 5월 목철은 ‘세계화와 민주주의’를 토론했고, 2003년 5월엔 ‘생명복제 연구를 둘러싼 윤리적 쟁점들’을 짚었다. 2005년 10월 ‘사이버 세계와 인간의 가치’를 탐색했고 2006년 11월엔 ‘디지털 시대의 미학’이라는 주제에 이르렀다. 오는 11월13일로 예정된 504회 강좌는 ‘지구 온난화와 인류의 미래’다.
1990년대 세미나 주제가 ‘칸트의 자연과 인간’(91년 9월), ‘하버마스의 진리론’(92년 5월) 등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사회 변화와 더불어 목철의 관심사도 다양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기회가 닿을 때마다 해외 석학을 초청했던 것도 목철의 자랑거리다. 위르겐 하버마스와 슬라보예 지젝, 페터 슬로터다이크, 피터 싱어, 마사 누스바움 등이 다녀갔다. 김지하 시인, 박노해 시인 등도 기꺼이 목철의 연사로 나섰다.
그러나 가장 성대해야 할 500회 행사에는 해외 석학도, 유명 인사도 부르지 않았다. 500회 초청 연사라는 영예를 누릴 자격이 충분한, 학문이 깊은 한국 철학자를 초청하고 싶었다. 결국 원년 멤버로 제1회 세미나에서 주제 발표를 했던 변규룡 교수가 같은 주제(‘아가페와 자비’)로 발표하고, 김영진·백승균·임수무 교수가 토론을 맡았다.
우리 나이로 75세지만 여전히 정정한 변 교수는 “28년 전의 일을 회고하려니 감개가 무량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옛날 것을 재탕하려니 힘이 안 난다”며 새로운 원고까지 써왔다. 규모는 소박했지만 목철 사람들에겐 더없이 뜻깊은 자리였다.
인문학의 위기, 인문학으로 넘는다
이날 모임이 교수들의 ‘홈커밍데이’에 그쳤던 것은 아니다. 목철은 전체 3부로 구성된 기념 행사 중에서 1부를 학생들에게 내줬다. 1부의 주제는 ‘UCC(사용자 제작 콘텐츠)로 만나는 인문학’. 10개 팀의 학생들이 ‘소통’이라는 주제로 각기 제작한 UCC 작품을 출품해 경연대회를 벌였다. 이는 목철이 기존의 강의 형식을 탈피해 대중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서려는 노력이자, 한국학술진흥재단(학진)이 주최하는 ‘인문주간’ 행사의 일환이기도 하다.
UCC 경연대회 직전에는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가 미학 패러다임의 변화를 주제로 1시간가량 강연했다. 강의실을 채운 학생들은 숨소리 한번 크게 내지 않은 채 연단을 주시했고, 강의가 끝난 후엔 ‘사인 공세’로 진 교수의 수고에 화답했다.
기념 행사는 성황리에 끝났지만 다음 500회를 이어나가야 하는 것은 목철의 몫으로 남았다. 중단없이 500회를 달려오긴 했으나 ‘인문학의 위기’를 목철이라고 피해 갈 도리는 없기 때문이다. 인문학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크지 않고 재정적 기반이 견고하지 않다는 게 문제다.
계명대 철학부장 이동희 교수는 이날 2부 행사를 여는 인사말에서 달라진 주변 환경이 목철에 위협 요인이 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인문대 학생들은 취업이 어렵고, 인터넷과 매스미디어가 발달하면서 젊은이들의 기호와 취향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자립 기반을 마련해서 600회까지 가야하지만 학교와 학진에 기대야 하는 상황”이라고 털어놨다.
하지만 전통있는 철학 세미나 하나를 지키지 못한다는 것은 대학 차원을 넘어 나라의 불행이다. 진중권 교수는 “취직 공부, 입시 공부만 하면 나중에 아무 것도 남는 게 없다”며 “대한민국에 망조가 들었다. 이런 식으로는 미래로 나갈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인문학이 튼튼하게 발전해야 괜찮은 문화 콘텐츠가 계속 나오고 산업도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500회의 영광을 뒤로 하고 목철 사람들은 다시 옷깃을 여민다. 여건은 우호적이지 않지만 이 길이 옳은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박상혁 교수는 “목철이 600회, 700회를 맞을 즈음에는 해외 석학에 버금가는 훌륭한 한국 철학자들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최희진기자 dais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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