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딸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면 투쟁 멈출 수 없죠”
친척들이 물을 것이다. “아직도 안 끝났냐”고. “그 정도 했으면 이제 그만하라”고 타이르는 어른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아줌마’들은 명절날 친지를 만나는 일이 두렵다. 여기서 물러설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을 어떤 말로 설명해야 이해받을 수 있을까.
이랜드 일반노조 조합원들이 지난 2일 서울 창전동 이랜드 사옥 앞에서 ‘추석 투쟁대잔치’의 첫 집회를 열고 있다. |김영민기자
11일은 이랜드 일반노동조합(홈에버·2001아울렛 노조)의 아줌마 조합원들이 이랜드그룹을 상대로 싸움을 시작한 지 447일째 되는 날이다. 지난해 6월 첫 파업을 벌였을 때만 해도 조합원들은 1~2개월 안에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노사는 접점을 찾지 못했다. 계절이 다섯번 바뀌었고 조합원들은 길 위에서 두번째 추석을 맞이하게 됐다. 기가 막히는 일이다.
그래도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 이번 추석은 노조에 매우 중요한 기회이자 고비다. 이르면 이달 안에 홈에버의 주인이 이랜드에서 삼성테스코(홈플러스)로 바뀌기 때문이다. 삼성테스코가 노조에 어떤 타협안을 제시하느냐에 따라 이랜드 파업은 마무리될 수도, 장기화될 수도 있다. 노조가 이달 2~10일 수도권 매장을 돌며 ‘2008 추석 투쟁대잔치’를 벌이는 것도 새로운 교섭 상대에 대한 협상력을 제고하기 위해서다.
‘대잔치’ 3일째인 지난 4일 서울 상암동 홈에버 월드컵몰 앞 천막농성 현장에 모인 조합원들은 50명 정도였다. 당초 파업 인원은 500~600여명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수도권과 순천, 울산 등지에 200여명만 남아 있다. 일단 먹고 살아야 하겠기에 직장에 복귀하거나 다른 일거리를 찾아 떠난 것이다. 이날도 생계형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고 농성에 전념하는 조합원들만 참석했다.
물론 이들이라고 해서 생활이 여유로운 것은 아니다. 노조가 조합원들에게 매달 1인당 25만원씩 지급하지만 집안 살림에 보태는 것은 꿈도 못 꾼다. 집회 장소까지 오고가는 교통비와 밥값으로 쓰고 나면 끝이다. 자녀들이 모두 자라 취직이라도 한 집은 그나마 형편이 좀 낫다. 중·고등학생 아이를 둔 조합원은 교육비 걱정이 태산이다. 조합원 중에는 혼자서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한부모 가정의 가장도 적지 않다.
당장 가족을 위해 쓸 돈도 없는데 내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에 신경쓸 겨를이 있겠는가. 조합원들은 집회가 있는 날이면 냉동실에서 찐빵이며 고구마 따위를 꺼내 도시락으로 싸온다. 평균 연령이 40세가 넘는 여성들이 차가운 보도블록에 앉아 빵으로 끼니를 때우니 소화가 잘 될 리 없다. 파업 1년여 만에 위장병은 조합원들의 고질병이 됐다. 다행히 이날 저녁엔 따뜻한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진보신당 당원들이 농성 현장에 솥을 들고 나와 카레밥을 만든 덕분이다.
이랜드 노조보다 더 오랜 기간 농성하고 있는 KTX 승무원들도 아줌마들을 응원하기 위해 상암동을 찾았다. “투쟁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전국철도노동조합 서울 KTX 승무지부 조합원 정OO입니다.” 목소리가 대차다. 승무원 ‘언니’들이 900여일의 농성을 겪으며 투사가 다 됐다. 그러고보니 이랜드 조합원도 여성, KTX 조합원도 여성, 홈에버 앞은 여성들 천지였다. 어느 시인이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느냐고 물었던가. 아무래도 그 여학생들은 사회에 나와 비정규직이 된 것 같다. 그들은 상암동 천막에, 서울역 앞 천막에 있었다.
홈에버 정규직이었던 황옥미씨(48)가 파업에 동참하며 비정규직 문제 해결에 열심인 이유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황씨는 딸만 셋이다. 둘은 대학에 진학했고 막내는 중학교 1학년이다. 딸들은 엄마가 고생하는 게 안쓰럽다. “정규직인데 왜 힘들게 파업을 하냐”며 엄마를 말렸다.
그러나 황씨는 작은 힘이라도 보태 부당한 일을 바로잡고 싶다고 했다. 딸들의 미래를 위해서다.
“우리 딸 친구들이 2년제 대학을 나와서 취직을 했는데 거의 다 비정규직으로 취업을 한 거예요. 우리 딸도 취업이 눈앞에 있는 상황인데 비정규직 되지 말라는 법이 없잖아요.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우리가 부모로서 (싸움을) 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실제로 남성보다 여성 노동자의 비정규직 비율이 높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지난해 12월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출한 연구용역 보고서에 따르면, 유통서비스 부문에서 남성은 비정규직 비율이 73.9%인 데 비해 여성 비정규직은 84.8%에 달했다. 임금 격차도 크다. 홈에버 같은 유통 산매업의 경우, 여성 비정규직의 월평균 임금총액은 2007년 8월 현재 93만원으로 남성 비정규직(120만원)의 77.5%, 남성 정규직(216만원)의 56.5%에 불과한 것으로 조사됐다.
여기에 여성이라 겪어야 하는 모욕과 수치심은 ‘덤’이다. 홈에버 여성 노동자들은 립스틱 색깔과 머리 모양을 사측에 검사받아야 했다. 지난 5월 인권단체연석회의 등이 발표한 인권보고서를 보면, 이들은 사측한테 ‘여성은 생리휴가가 있어 남자 직원보다 휴무가 한 개 더 발생하니 아줌마 둘은 다른 부서로 보내고 남자 직원을 다시 뽑아야겠다’는 등의 말까지 들었다. 화장실도 제때 가지 못하고 온종일 서서 일했던 직장이다. 사람 대접 받으며 일하고 싶다는 바람이 길에서 1년을 싸워야 할 정도로 지나친 욕심인 것일까.
파업이 장기화되면서 사람들은 지쳐가고 있었다. 빠듯한 살림살이와 “아직도 파업하고 있느냐”는 주위의 냉대가 가장 큰 부담이다. 익명을 요구한 조합원 김모씨(40)는 언제까지 집회에 나올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고 했다. “내년이면 큰 애가 중학교에 가요. 학원을 보내야 할 텐데 그것 때문에 좀 걱정이에요. 안 들어가던 돈이 들어갈 테니 일을 안 할 수도 없고….”
지난해 추석에 이랜드노조와 함께 불매운동을 했던 단체들의 분위기도 예전만큼 뜨겁지 않다. 인터넷 포털 ‘다음’의 토론방 ‘아고라’ 네티즌들이 가끔씩 집회 현장에 들러주는 게 큰 위로다.
추석 연휴는 공식적으로 쉬는 날이지만 홈에버 월드컵몰의 천막 농성은 계속된다. 간부들이 돌아가며 천막을 지킬 예정이다. 지금 이랜드노조를 응원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이랜드 일반노조 홈페이지(www.elandtu.or.kr)에 접속하면 자동이체 후원 신청을 할 수 있다. 이랜드노조가 펴낸 책 ‘우리의 소박한 꿈을 응원해 줘’를 구입하는 것도 아줌마들에게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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