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난 시리즈=====/최희진의 뉴스 속 인물

광우병 다큐 ‘괘씸죄’, ‘지식채널e’ 떠나는 김진혁 EBS PD

ㆍ소외된 것 되돌아보기
ㆍ편견 비판적으로 보기
ㆍ이것이 ‘지식채널e즘’

시절이 하 수상하다는 방증일까. 영웅이 될 생각이 전혀 없었던 사람들이 본의 아니게 ‘투사’가 되고 ‘열사’가 되고 있다. 타인의 이야기를 전하는 게 생업인 언론 종사자가 되레 뉴스 인물로 주목받는 사건이 빈발하는 것을 봐도 그렇다.


                               김진혁 PD는 “원래 평범한 PD인데 사회 분위기가 나를 특별한 PD로 만들었다”며 
              “ ‘지식채널e’를 통해 새로운 프로그램 형식을 만들어냈다는 데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정지윤기자>


EBS 교양 프로그램 ‘지식채널e’의 연출을 맡았던 김진혁 EBS PD(34)도 최근 언론계가 배출한 ‘투사’ 중 하나다. 지난 5월12일 광우병을 소재로 한 ‘17년 후’ 편을 제작, 방송한 게 발단이 됐다. 청와대 관계자는 ‘17년 후’의 내용이 ‘궁금하다’며 EBS에 전화를 걸었고, EBS 경영진은 이미 이틀 동안 전파를 탄 ‘17년 후’의 방영을 돌연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김 PD는 고민 끝에 이 사실을 적어 사내 게시판에 올렸다. 이 글이 외부로 유출되면서 세상은 김 PD의 이름과 ‘지식채널e’를 둘러싸고 벌어진 사건을 알게 됐다. 우여곡절 끝에 ‘17년 후’는 예정대로 일주일간 방영됐지만 김 PD는 지난주 방송을 마지막으로 교체됐다.

통상 인기 좋은 프로그램의 PD는 인사철이 와도 다른 프로그램으로 발령하지 않는 게 방송사의 인사 관행이다. 김 PD는 2005년 9월 ‘지식채널e’의 첫 회를 내보낸 이래 지난 3년 동안 이 프로그램을 EBS의 간판 스타로 키워낸 연출자다. EBS 노조가 이번 인사를 놓고 ‘보복성 인사’라고 항의하는 이유다.

지난 21일 서울 도곡동 EBS에서 김 PD를 만났다. 그는 ‘지식채널e’의 마지막 방송분을 내보내고 새로 맡게 된 ‘원더풀 사이언스’로 옮겨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앞에 나서는 것이 ‘지식채널e’의 차기 제작진에게 누가 될까 봐 말하기를 조심스러워했다.


-사내 게시판에 처음 글을 쓸 때 일이 이 정도로 확대될 것을 예상했습니까.
“전혀 몰랐습니다. 애당초 사건을 외부에 공개할 생각이었다면 (사내 게시판에 글을 올릴 것이 아니라) 떳떳하게 얘기를 했겠죠.”


-인사 대상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까.
“대충 들었습니다. 그런 움직임이 있다고. 노조에서 엄청나게 반발했어요.”


-‘지식채널e’ 인터넷 게시판에 ‘김 PD를 돌려달라’는 시청자들의 항의 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인터넷 포털 ‘다음’에서도 김 PD의 복귀를 요구하는 서명운동이 벌어지고 있고.
“이번 일로 묘하게 유명해졌어요. 저는 저보다는 프로그램에 포커스가 맞춰져야 한다고 항상 얘기해요. 시간이 지나고 기존에 해왔던 것들이 그대로 담보되지 않는다면 ‘김진혁=지식채널e’라는 신화가 남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러기를 원하지 않아요. 저와 ‘지식채널e’는 구분돼야 합니다.


-청와대가 거론된 사건이라서 시청자들이 차기 제작진의 정치적 성향을 속단하거나 오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사 조치를 바라보는) 프레임 자체가 투쟁 프레임으로 형성돼 있어서 그게 조금 걱정이 됩니다. 제가 프로그램을 만들고 이름만 다른 PD로 바꿔놓아도 시청자분들이 그 프로를 비난하실 수 있는 상황인 거죠.”


-가족이나 주변 분들이 걱정하지 않습니까.
“집에선 별 말씀 없으세요. 걱정하지 마시라고 말씀드렸고요. 옛날처럼 남산에 끌려가거나 누가 제 뒤를 밟는 것도 아니잖아요.(웃음) 솔직히 저를 대단하게 평가하시는 것들이 민망해요.”

김 PD 자신은 대단할 것이 없다고 했지만 지금까지 방송된 ‘지식채널e’의 소재들은 범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수상하기까지’했다. 간디의 비폭력·불복종 운동을 다룬 ‘위대한 싸움꾼’ 3부작이나, 그리스 아고라 광장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토론의 달인’ 편은 촛불집회에 대한 지지 표명으로 읽히기 충분했다. 나치 선전부장관 괴벨스 이야기를 그린 ‘괴벨스의 입’ 편은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됐다.

어디 그뿐인가. 그가 고별 작품으로 선택한 ‘3년’ 편은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복직 투쟁을 소개하고 있었다. 프로그램 소재를 보고 짐작하건대 이건 영락없는 ‘좌빨(좌익 빨갱이)’인 것이다. ‘혐의’를 추궁하자 그는 “국가를 위해 학생군사훈련단(ROTC) 정훈장교로 복무한 ‘극우보수’ ”라고 했다.


-소재가 편파적이라는 얘기를 자주 들었을 것 같은데.
“많이 듣죠. 재미있는 사실은 ‘지식채널e’의 아이템이 최근에만 그랬던 게 아니라 과거에도 그랬다는 겁니다. 지금 시대 상황이 이념을 굉장히 중요한 검증 잣대로, 혹은 유일한 검증 잣대로 여기는 분위기잖아요. 그래서 그런 얘기들이 나오는 거예요.”


-하지만 최근에 방송된 프로그램들은 어떻게 봐도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판으로 풀이됩니다.
“당연히 그렇죠. 저희는 항상 정부에 비판적인 자세를 취해왔어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언론은 원래 그런 특성을 가지고 있잖아요. 또 다른 이유는 ‘지식채널e’의 컨셉트가 ‘소외’이기 때문입니다. 소외는 집권 세력이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집권 세력이 놓치고 있는 부분을 끄집어내는 거예요. ‘왜 이건 안 보느냐, 여기도 좀 챙겨줘’ 이런 거죠.”


-‘소외’의 뜻을 좀더 자세히 설명하신다면.
“가장 화제가 됐던 ‘17년 후’도 소외에 관한 이야기예요. 광우병 파동 때 특정위험물질(SRM)이니 국제수역사무국(OIE)이니 하면서 싸웠잖아요. 그 와중에 광우병이 사회에 실제 일어났고 그래서 어떤 패닉 현상을 몰고 왔는지, 이런 것에 대한 근본적인 얘기는 어느 순간부터 사라져 버렸습니다. 저희는 조용히 그쪽으로 가서 그 얘기를 한 거죠. ‘대한민국에서 초딩으로 산다는 것’ 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외 계층으로 저소득층이나 노인을 많이 얘기하잖아요. 물론 이 분들도 소외돼 있지만 최소한 이 분들은 성인이어서 자기표현을 해요. 그런데 초등학생은 대항력이 없어요. 어찌 보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소외된 게 초등학생이 아닐까. 그래서 초딩 편을 만들었고 ‘17년 후’가 나오기 전만 해도 그게 조회수 1위였습니다.”


-널리 알려진 얘기가 실은 진실이 아니라고 반전을 선사하는 것도 ‘지식채널e’의 장기였습니다.
“‘지식채널e’는 ‘해체’라는 성격도 같이 갖고 있습니다. 해체로 시작해서 해체로 끝난 프로그램도 많아요. 링컨 편이라든지. (미국 남북전쟁은 노예해방 여부가 아니라 무역정책을 놓고 벌어졌으며, 링컨 전 미국 대통령은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흑인 노예를 해방시켰다는 내용의 ‘두 명의 대통령’ 편을 말함.) 시청자들은 혼란스러워지죠. 그 다음은 알아서 하시라고 우리는 모른 척하고. 이건 진중권씨를 벤치마킹한 겁니다. 왜 진중권이란 사람이 유명해졌나 보면, 그 분이 대안을 제시한 건 아니에요. 기존의 거품을 빼버리는 역할을 한 거지. 그렇다면 ‘오케이, 카피!’ 이렇게 되는 거죠.(웃음)”


-열혈 시청자들이 많다는 것은 이런 성격의 프로그램에 대한 수요가 적지 않았다는 뜻이겠지요.
“방법론의 문제 같아요. 결과적으로 계몽의 효과를 갖는 것과 계몽을 위해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은 큰 차이가 납니다. ‘지식채널e’는 전자에 해당되고, 일반적인 캠페인이나 다른 프로그램은 계몽의 목적을 갖고 하니까 거부감을 양산했던 거죠. ‘지식채널e’는 내용을 가르치기보다 소외의 현장 바로 옆에 있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그래서 시청자가 스스로 느낄 수 있도록 최대한 도와줘요. 그게 알려진 내용에 대해서도 시청자분들이 새롭다고 느꼈던 가장 중요한 이유 같습니다.

‘지식채널e’는 제목 그대로 지식을 전달했지만, 백과사전 스타일의 지식은 아니었다. 비대한 주류 권력의 부조리를 통렬하게 지적하고 사회적 소수자를 ‘찬양·고무’하는 성찰적 지식이었다. 대사도 성우도 없이, 오래된 자료화면에 자막 몇 줄 얹은 5분짜리 교양 프로그램에 시청자들이 열광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간 ‘지식채널e’가 보여준 성격으로 미뤄봤을 때, 현 시점의 한국 사회는 비틀어보고 뒤집어볼 것이 넘쳐나는 ‘아이템의 보고(寶庫)’다. 이런 시국에 프로그램에 변화가 생겼고 시청자들이 이를 염려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이후 워낙 사건·사고가 많아서 소재 찾기가 한결 수월하지 않았습니까.
“똑같아요. 노무현 정부에서도 할 것 많았습니다. 제가 직접 제작한 건 아니었지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라든지 평택 대추리 사건 편이 있었고 ‘미친 공장’이라고 광우병 얘기도 했고요.”


-이번 김 PD 사건 탓에 PD들이 아이템을 선정할 때 심리적으로 위축될 가능성도 있을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어떤 압박감이나 달라진 분위기를 느끼는 건 마찬가지일 겁니다. 돌아가는 눈치가 약간 냉랭하잖아요. 저는 한편으로는 우리가 옛날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우리의 민주주의가 언제든지 과거로 회귀할 수 있을 만큼 취약하다는 뜻입니까.
“지난 10년간 민주주의가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고 믿었는데 여기에 거품이 있었던 겁니다. 민주화가 우리나라 시스템이나 국민의식에 완전히 뿌리내렸다고 볼 수 없을 것 같아요. 사실 이런 일을 정부가 혼자서 밀어붙인다고 볼 수는 없죠. 오히려 많은 국민들이 침묵하거나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다고 봅니다. 어쨌든 국민이 뽑은 대통령이잖아요. 저는 국민들이 언론이나 선전·선동에 속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국민이 원했던 것이고, 이 사람들은 정부가 그것을 이뤄주길 여전히 바라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소 비관적인 시각인 것 같은데.
“물론 뒤로 마구 가지는 않겠죠. 버락 오바마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가 한 얘기 중에 제가 고개를 끄덕였던 게 있어요. 쉽게 얘기하면, 대중은 방송법 한 줄 한 줄은 잘 몰라도 정연주 KBS 사장을 쫓아낸 게 누구의 이익을 위한 것인지 정도는 다 알고 있다는 겁니다. 진보 세력이 바라는 것처럼 유럽 수준의 민주주의가 하루아침에 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80년대로 돌아가지도 않을 거예요.”


-‘지식채널e’는 계속 유지되겠지만 김 PD가 만들어놓은 프로그램은 지난 23일로 방송을 마쳤습니다. 아쉬워하는 시청자들에게 인사를 전하신다면.
“차기 제작진이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 지켜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지식채널e즘’이라는 표현을 써요. ‘지식채널e즘’은 좌파든 우파든 소외된 것을 되돌아보고 편견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줄 아는 능력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시청자들 스스로 이런 능력을 갖추게 되는 것, 저는 이게 나름대로 ‘지식채널e’의 산물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이 프로그램에서 3할의 역할을 했다면 시청자분들이 3할을 했고 시대적 요구가 4할을 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공동의 산물이니까 잘 지켜내고 여기서 소통이 계속 이뤄지게 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게 잘되면 시청자분들도 좋고 저희 EBS도 좋은 일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