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은 확인된 사실만을 기사로 쓴다. 이것은 언론 보도의 알파요 오메가다. 이것은 언론을 언론으로 존재하게 하는 핵심적 규범이다.
진지하게 기자 생활을 하거나 진지하게 기자를 지망하는 모든 사람이 한 줄 한 줄 밑줄 그으며 읽고 달달 외었으면 싶은 책이 있다. <뉴욕 타임스> 워싱턴 지국장 출신인 빌 코바치와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에서 미디어 비평을 담당했고 <뉴스위크>에서 의회를 담당한 톰 로젠스틸이 함께 쓴 <저널리즘의 요소: 뉴스 종사자가 알아야 할 것과 대중이 기대해야 할 것>이다. (한국어 번역본도 있다.)
저널리즘의 바이블이라고 해도 좋을 이 책에서 두 사람은 언론이 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지켜야 할 열 가지 원칙을 서술하고 있다. 그 중 첫째가 "저널리즘의 최우선 가치는 진실이다"이며, 그 중 셋째가 "저널리즘의 핵심은 사실 확인이다"이다. 둘을 합치면, 저널리즘이란 쉼없는 사실 확인 작업을 통해 진실에 접근해 가는 직업 영역이라는 말이 되겠다. 저널리즘의 규범으로서 너무나 핵심적이다 못해, 그 자체로 언론이나 저널리즘의 정의로 보아도 무방하리라 싶은 항목이다.
최근의 언론 기사들을 보면, 한국의 뉴스 매체에 저널리즘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 하는 의문이 수없이 든다. 기자라는 직함을 가진 사람들이 대중매체라는 공간에다 기사라는 글을 써 내는데, 저널리즘으로서 가져야 할 핵심 알맹이는 도무지 보이지 않으니, 언론의 원칙이며 사명은 다 어디로 갔는지 도무지 짐작을 할 수가 없다.
지하철 난투극 동영상 `폭력 할머니` 논란 사실일까?
<한국경제신문> 기사다. 제목부터 죽여준다. "사실일까?"라고 독자에게 묻는다. 어쩌라는 말이냐. 언론임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하는 꼴이다.
제목에 어울리게, 기사 내용도 추정과 소스가 명확하지 않은 인용, 확인되지 않은 소문을 모아놓았다. 쉽게 말해서, 인터넷에 흘러다니는 이런저런 '썰'을 모아 기사로 만들었다.
"목격자로 추정되는 한 네티즌의 말에 따르면... 라고 설명해 다른 네티즌의 놀라움을 샀다."
"... (해 왔)다는 증언이 나오면서 ... 집중 관심을 받고 있다."
"목격담과 진술이 계속해서 달리고 있다."
언론의 역할이 가만히 앉아서 인터넷 댓글을 중계하는 것인가. 이런 기사는 편하게 앉아 클릭만 해도 쓸 수 있다. 기자는 편하게 앉아서 클릭만 할지 모르지만, 그 결과 나오는 이런 기사에 의해,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되지도 않은 채, 사건의 당사자는 천인공노할 공공의 적으로 내몰려 간다.
이런 이슈가 정말 보도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다면, 언론이 해야 할 일은 "인터넷에서 이랬대요 저랬대요"가 아니라, 인터넷에 나온 이야기들을 검증하는 것이다. 저널리즘의 제3 원칙인 '사실 확인'인 것이다. 어떻게 검증하냐? 그걸 찾아내는 게 언론이고 기자다.
'지하철 난투극' 동영상 할머니 정체...2호선 시비 거는 할머니(?)
<경기북부일보> 기사다. 여기서도 제목에 물음표를 달았다. '정체'라는 어마어마한 단어를 쓰면서도 그랬다.
"잇따른 목격담에 따르면 ... (한)다고 한다. 또 다른 누리꾼은 ... (했)다고 주장하고 있어 ... 과도하게 상습적으로 폭력을 휘둘렀던 게 아니냐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누리꾼들의 의견이 사실인지를 확인할 길이 없는 이유로 ... 누구의 잘못이 더 큰지 가늠하기 쉽지 않은 상태다."
인터넷의 의견이 사실인지를 확인할 수 없다고 고백하면서도 그런 이야기를 그대로 기사에 실었다. 어이가 없다. 게다가 "상습적으로 폭력을 휘둘렀다"라는 확인되지 않은 주장을 인용하면서, 대상자의 캡쳐 사진까지 선명하게 실었다. 언론사에 법률과 관련한 고려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기사는 나올 수 없다고 본다.
뉴스 보도에서 다른 사람의 주장을 인용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이것은 '그 사람이 그런 주장을 했다'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처럼 인용의 사실성이 인정되려면 발언자가 명확해야 한다. 이것은 기사의 신뢰도와 직결되는 문제다. 특정되지 않은 취재원, 이를테면 '고위 관계자에 따르면' '전문가들은' 따위의 서술이 기피되어야 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기자의 눈에 선별적으로 띈 익명의 발언자를 그대로 기사에 옮기는 것은 "본 기자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라고 쓰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또 인터넷 여론을 보이기 위해 이른바 '누리꾼'을 인용하는 기사도 자주 볼 수 있다. 기자들이 취재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범하게 되는 '편의적 샘플링'의 위험이 그대로 드러나는 보도 행위지만, 지금 이야기하는 주제와 관련해 보자면, 이 경우는 사실 확인에 목적이 있지 않고 대체적인 여론을 보이려는 것이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일처럼 특정한 사건의 진실을 가리는 문제에 대해 '누리꾼의 증언에 따르면'이라는 식으로 보도하는 것은, 다시 말하지만 언론이 왜 존재하는가를 까마득히 잊은 결과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인터넷이 얼마나 많은 허위와 편견과 거짓과 허세와 장난과 개그로 오염되어 있는가. 그건 이제 비밀도 아니지 않은가. 사실을 놓고 벌어지는 논란에 있어 '누리꾼에 따르면'이란 말은 얼마나 위험한 인용인가.
‘지하철 난투극’ 진실공방
<스포츠칸> 기사다. 진실 공방이라고 하여 역시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갑론을박을 그대로 중계했다.
"매일 2호선을 타는 20대 회사원이라고 밝힌 누리꾼은 ... 라고 설명했다. ... (라는) 증언이 나오면서 피해자에서 '폭력 할머니'로 돌변했다."
"동영상 속 소녀의 사촌언니의 친구라는 누리꾼은 ... (라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전혀 상반되는 증언이 또다시 올라와 넷세상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 (라며) 여학생이 잘못했다는 의견을 적고 있다. 글에 따르면 ... "
"이처럼 전혀 상반된 목격담을 놓고 누리꾼들은 "진실이 도대체 뭐냐"는 반응과 함께 ..."
누리꾼은 "진실이 도대체 뭐냐"라고 물을 수 있다. 언론도 덩달아서 같이 물어보면 안 된다. 사돈의 팔촌삘이 나는 자칭 '소녀의 사촌언니의 친구'의 말까지 그대로 인용하면서 중계 보도를 하는 것은 진실에 봉사하기 위해 사실을 치밀하게 확인해야 하는 언론의 사명에서 한참 벗어나 있는 것이다.
위의 세 기사는 내 마음대로 고른 게 아니라, 한 뉴스 모음 사이트에서 해당 이슈로 나열된 기사들 중 맨 앞의 세 기사를 차례로 인용한 것이다. 그 밑의 다른 매체 기사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경우를 보자
또 가령 이런 경우를 보자. 어느 대학의 한 동아리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졌는데, 양쪽의 주장이 전혀 다르다. 이 경우 "갑측은 이렇게 주장한다고 하고, 을측은 이렇게 주장한다고 합니다. 진실은 뭘까요?"라는 기사를 써서야 되겠는가. (굳이 보도를 하려면) 당연히 양측의 액면 주장을 넘어서서, 양측을 취재하고 관계자나 증인도 취재해서 취재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 합당한 '사실 확인'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리하자면, (대표성의 위험은 있지만) 어떤 이슈에 대해 여론을 보여주는 형식이나, 어떤 문제에 대해 전문가들 사이에 진행되는 논란의 경우는 서로 다른 의견이 오고가는 자체를 보도할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특정한 사건에서 진위가 불확실하고 주장이 엇갈리는 경우인데도, 양측의 발언을 그대로 중계하는 데서 그치고 마는 것은 언론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고백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조금 경우는 다르지만, 한 달 전에 한 청년이 철강회사 용광로에 빠지는 사고로 목숨을 잃었을 때, 인터넷에 추모시 '그 쇳물 쓰지 마라'가 올라와 널리 알려진 적이 있다. 인터넷과 뉴스 매체들이 함께 감동에 빠져 있을 때, 한 신문은 그 필자를 수소문하여 그의 마음가짐을 간접적으로나마 확인해 낸 바 있다. 하려면 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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