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수 | 드라마작가
현대사회는 미디어사회가 된 지 오래다. 대부분의 소통매개가 미디어일 뿐만 아니라, 그 영향력도 태풍 볼라벤급 이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조선시대에 TV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필자의 직업이 직업인지라 세조 시절로 타임슬립해 드라마 한편 써볼까 한다.
당시의 권력을 독점하고 있던 세력은 소위 훈구파(오늘날의 칠성파나 파라다이스파 같은 개념이 절대 아님)라고 해서 세조의 왕위찬탈에 공을 세운 대신들과 그 일족들이었다. 한명회, 권람, 정인지, 신숙주와 같은 인물들이 그들이다. 이들은 왕에게서 공신전과 과전 등 엄청난 부동산을 하사받고, 의정부 정승과 육조의 판서 등 소위 권력의 콜레스테롤 덩어리 달걀 노른자를 모조리 잡수고 계셨다.
그렇게 훈구파는 오랜 세월 동안 천국 같은 생활을 누리고 계시는데, 함경도 지역 차별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킨 이시애를 뒤집기 한판으로 꺾고, 이후에도 도적과 외적 토벌 등 연달아 한판승을 거두며 병조판서까지 치고 올라오는 새파란 후배 남이 장군이 왠지 껄쩍지근해진다. 왜? 남이 장군은 훈구세력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니까! 그때 훈구파의 음해 저격수 유자광이 남이 장군을 한방에 보낼 이얼령비얼령 ‘아리까리’한 정보를, 자신이 뒤를 봐주고 있던 방송사 간부에게 슬쩍 흘리며 잘 요리해보라고 한다. 그건 여진토벌을 앞두고 읊은 남이 장군의 시였다.
백두산석마도진(白頭山石磨刀盡)이요, 두만강수음마무(頭滿江水飮馬無)라, 남아이십미평국(男兒二十未平國)이면 후세수칭대장부(後世誰稱大丈夫)리오. (백두산의 돌은 칼을 갈아 닳게 하고, 두만강의 물은 말을 먹여 없애도다. 사나이 스무 살에 나라를 평정치 못하면, 후세에 그 누가 대장부라 일컫겠는가)
나라를 어지럽히는 외적을 깔끔하게 다림질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드러낸 시를 저녁뉴스 기자는 마치 남이 장군이 쿠데타를 모의한 것처럼 교묘하고 알쏭달쏭하게 편집해 보도하고, 백성들은 충격으로 잠을 이루지 못한다. 온 나라는 남이 장군 이야기로 들끓고, 훈구세력은 남이를 긴급체포해 군사재판에 넘겨야한다고 여론을 몰아간다.
MBC 사옥 앞에서 열린 방송 4사 구성작가협의회
하지만, 백성들 잘못 봤다. 사회 이슈에 대해 진실을 파헤치는 유명 탐사보도프로그램의 작가와 피디는 남이 장군 사태에 대해 훈구파의 음모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품고 이를 심층취재하려 한다. 하지만 이 기획안은 방송사 간부에 의해 “야! 안되애∼!”가 되고 만다.
진실을 파헤쳐보려는 기획안이 거부당한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훈구파 비리와 조금이라도 관련된 기획안이면 대부분 거부당했다. 왕과 훈구파의 내관으로 전락한 방송사를 개탄한 직원들은 파업을 하고 탐사보도프로그램의 작가들은 그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파업 170일 동안 일을 못한 그들이었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유혹을 참으며 사회 비판적 기능을 회복해 진실을 백성들에게 전하는 참다운 방송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그들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파업이 끝나고 작가들은 희망에 들떠 프로그램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방송사 간부는 뉴스와 시사프로그램을 편집하다 못해, 작가들을 편집해버렸다. 이유인즉슨 ‘분위기 쇄신’이란다.
분위기 쇄신? 분위기 쇄신 맞긴 맞다. 훈구파에게 좀 더 열정적으로, 좀 더 확실하게 업그레이드해 밀어주기 위한 분위기 쇄신! 왜 진작 그 생각을 못했을까? 영상편집 할 것 뭐 있어! 사람을 편집해 버리면 되는 것을! 양심을 편집해버리면 되는 것을!
작가를 편집해버린 조선 최초의 필화(筆禍)사건! 하지만 현대인들은 이 드라마를 보면서 이런 반응으로 시청자게시판을 도배할 것이다. “헐∼ 웃긴다. 옛날엔 그랬구나. 만약 요즘 그런 일이 있다면 진짜 코미디일 듯!” (작성자 여의도유치원 짱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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