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유족 위로 장면은 보도하면서, 유족 분노 영상은 뺀 TV뉴스
29일 오전 경기 안산 화랑유원지 여객선 세월호 침몰사고 희생자 정부합동분향소. 세월호 침몰사고로 딸을 잃은 한 어머니가 조문을 온 박근혜 대통령을 향해 억울함과 분함을 외치며 울부짖었다.
자신도 모르는 새 아들, 딸의 영정과 위패가 옮겨진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어떤 유족들은 가슴을 치며 분통을 터뜨렸다. 현장을 취재하던 방송사 카메라들은 곧바로 이들을 촬영했다.
잠시 뒤 방송·통신 등 속보 매체들은 박 대통령의 분향소 방문을 기사로 내보냈다. 박 대통령이 유족을 껴안고 위로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이 포털사이트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방송사 카메라들이 찍었을 분노하는 유족들의 모습은 없었다.
이는 세월호 침몰사고를 보도하는 한국 언론들이 불신받고 있는 이유를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대통령의 분향소 방문은 ‘사실’이지만, 그 옆의 ‘또 다른 사실’은 보도하지 않았다. 유족들의 눈물은 대통령과 함께일 때 뉴스가 됐지만, 대통령과 정부에 항의할 때는 감춰졌다.
세월호 침몰사고 보도는 처음부터 꼬였다. 정부는 세월호가 침몰한 16일부터 바다 위와 수중에서 헬기와 함정, 구조대원 수백명이 투입되는 ‘사상 최대 규모의 수색작업’을 벌이고 있다고 발표했다. 언론은 여과 없이 받아 썼다.
하지만 현장은 달랐다. 수색에 투입된 인력이 최대 10여명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실종자 가족들이 배를 타고 현장에 가 본 뒤에야 밝혀졌다.
실종자 가족들은 정부와 이를 대변한 언론에 분노했다. 실종자 가족 최모씨(45)는 “선장이 사고를 만들고, 정부가 사고를 키웠고, 언론이 이 지경까지 방조했다”고 말했다. 최씨는 “대통령도 왔고 장관도 왔다. 이젠 세월호 보도를 이끈 언론 책임자가 진도로 와서 없었던 구조작업을 왜 있는 걸로 만들었는지, 아무도 들어가지 않는데 왜 침묵했는지 말해야 한다”며 “분위기를 타고 ‘반성’ 운운하는 언론을 믿지 못한다”고 말했다.
세월호 침몰사고 현장의 기자들은 이런 불신 분위기 때문에 큰 곤욕을 치러야 했다. 지난 16일 저녁 진도 실내체육관에 몰려든 방송 카메라들은 실종자 가족들에 의해 쫓겨났다. 24일 이주영 해양수산부 장관과 김석균 해양경찰청장이 실종자 가족들과 가졌던 마라톤 대책회의에도 언론은 환영받지 못했다.
취재진이 모여들자 한 실종자 가족은 “기사를 똑바로 쓰지 않고 정부 발표만 그대로 옮기는 기자는 필요없다”며 “모두 나가라”고 다그쳤다. 다른 실종자 가족은 “지상파 방송사는 모두 대책회의 현장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라”며 “들키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말했다. 가족대표회의에서도 ‘기자 색출’은 우선순위가 돼 버렸다. 외신에만 인터뷰하는 실종자 가족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전문가들은 언론이 비판기능은 잃은 채 속보 경쟁과 선정적 보도만 하려는 태도가 불신의 이유라고 지적한다. 강상현 연세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는 “종합편성채널 등이 등장하면서 시사보도를 자극적으로 하는 경향이 생겼다”며 “이번 세월호 침몰사고는 이런 경향에 불을 붙인 꼴이 됐다”고 말했다.
강 교수는 이어 “속보, 특종 경쟁 때문에 검증되지 않은 보도를 따라가고, 이 과정에서 정확하지 않은 정보들이 보도되는 것이 큰 문제”라며 “언론은 침착하게 국민들이 정확하게 재난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절제된 보도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남재일 경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언론사들이 속보 경쟁을 하면서 검증되지 않은 정보나 정부 공무원들이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내놓은 자료를 그대로 활용했다”며 “재난 보도 때는 검증된 내용을 내보내고 기사 꼭지 수를 줄여 나가야 하는데, 한국 언론들은 반대로 실시간으로 중계하고 검증하려는 노력도 없다”고 말했다.
남 교수는 이어 “세월호 침몰사고는 사회 구조적인 모순 등이 드러난 의미가 큰 사건이다. 하지만 언론사들은 유족들의 슬픈 사연 등에 집중해 사고를 개인적 차원으로 보도하는 잘못된 역할을 하고 있다”며 “국민들의 감정만 자극하는 사연 보도는 자제하고, 재난에 대한 합리적인 예방 정책, 구조적 모순 등을 짚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박은하·박용근·박순봉·조형국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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