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영 충남대 교수·언론정보학
독자를 염두에 두지 않은 글쓰기가 가능할까? 모든 글쓰기는 독자를 동반한다. 개인의 은밀한 기록인 일기조차, 난 독자를 의식하며 쓴다고 본다. 자기 자신이 독자일지언정. 그래서 글쓰기는 (나를 포함한) 독자와의 대화다.
경향신문이 상정하고 있는 독자는 누구인가? 이를 묻는 까닭은 그에 따라 신문의 전부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어떤 이슈를 다루고 어떤 측면에서 접근할지, 이를 어디에 어떻게 배치할지 등등. 뉴스가치 판단부터 기사의 주제, 소재, 구성, 표현, 그리고 취합된 기사들의 편집까지 모든 과정은, 신문의 대화 상대인 독자에 따라 달라진다. 그렇지 않은 신문은 그저 숙련된 기자와 편집자가 생산하는 공산품일 뿐이다.
경향과 같은 종합일간지 독자는 학력과 소득 수준 등에서 단일 층위로 묶이기 어렵다. 정치와 문화면의 독자층을 똑같이 설정하는 게 바람직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독자를 소비자로 보는지, 아니면 시민으로 대하는지에 따라 신문의 품격이 좌우된다. 독자를 소비자로 취급하면 포털처럼 ‘제목 장사’를 하고 사안을 ‘이해관계’ 차원에서 다루기 쉽다. 반면 독자를 시민으로 간주하면 현안의 ‘인과관계’에 천착하기 마련이다.
구제역 매몰에 따른 2차 환경재앙 우려가 고조되는 등 민생위기가 확산일로다. 지난주 경향은 그 실상과 대안을 적절히 배합했다. 21일에는 매몰지 주변의 식수 공포와 농작물에까지 이어진 피해, 한숨뿐인 자영업자와 팍팍해진 먹거리를 생생하게 짚었다. 역시 발품 팔아 취재한 기사는 그 빛깔이 다른 법이다. 다음날 ‘손동우가 만난 사람’의 주인공은 강광석 전농 강진군 농민회 정책실장이었다. 경향의 필자로 6년째 낮지만 큰 울림을 주는 논객이기에 반가웠다. 농민인 그의 목소리가 각별히 이목을 끌 시점이기에 탁월한 선택이기도 했다. 24일자에서는 ‘박홍규 칼럼’(살처분되는 자연)과 김광수 한국단미사료협회 회장의 기고(축산청을 만들자)가 인상적이었다. 소박하면서도 정곡을 찔렀고, 참신한 정보와 제안을 담은 덕분이다.
경향은 구제역 재앙에 입체적으로 접근했으나 점입가경인 리비아 사태는 마치 ‘실황중계’하는 데 자족하는 듯했다. ‘내전으로 치닫는 리비아’가 22일자 1면 톱에 오른 뒤 26일까지, 즉 한 주 내내 전황보도가 1면을 떠나지 않았다. 조찬제 국제부 차장의 지적(24일자 ‘마감 후…’)처럼, 지난 1월 튀니지 ‘재스민 혁명’에서 점화된 아랍의 민주화 불길이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에 비견될 만한 폭발력을 지니고 있음은 얼추 이해하겠다.
그럼에도 인터넷도 아니고 방송도 아닌 신문이 시시각각 급변하는 동향을 굳이 1면에서 중계 보도할 필요까지 있을까. 그것도 현지에 파견된 경향신문 특파원의 렌즈가 아니라 외신을 가공한 뉴스에 불과한데. 외신보도는 100% 믿을 게 못 된다. 서구 통신사든 알자지라 방송이든 자기 시각에서 사안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이를 익히 알면서도 “핏빛 그림자”(25일자 1면)란 자극적 표현을 제목에 앞세우고 “최대 2000명 살해당해”(26일자 2면)란 전언을 헤드라인으로 올리는 식의 편집은 독자를 소비자 취급한 것이다.
독자를 시민으로 여기는 신문이라면 해설과 분석에 초점을 맞출 때다. 왜 2011년인지, 왜 아랍권인지, 그 여파와 교훈은 무엇인지에 대한 경향의 해석이 1면을 장식할 수 있어야 한다. 대니 로드릭 하버드대 교수는 한 일간지 칼럼을 통해 이집트와 튀니지의 경제성장, 보건, 교육 지표가 높은 편임을 지적하며 아랍이 던진 명징한 메시지는 ‘경제발전과 민주정치가 별개라는 것’이라 일갈했다. 경향은 아무 맥락 없이 사설을 통해 ‘아랍의 시민 혁명, 북한의 대응을 주목한다’(24일자)거나 ‘리비아 유혈진압에 침묵하는 이명박 정부’(26일자)를 거들먹거렸다. “무바라크와 카다피를 합한 것보다 더 폐쇄적이고 억압적인 북의 체제에 대해 현실주의적 대화와 지원만을 노래”했다고 진보 진영을 비판한 21일자 ‘국제칼럼’은 평소 경향의 논조와 달라 생경하기까지 했다.
현 정부 출범 3년을 맞아 경향이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가장 잘못한 국정은 ‘경제’, 향후 중점 추진과제도 ‘서민경제’, 그 다음이 ‘경제성장’이었다(25일자). 민생이 파탄인 마당에 먹고사는 문제만큼 절실한 게 있을까 싶지만 씁쓸했다. 경제규모 세계 15위라는 데도 여전히 ‘경제’ 프레임에 갇힌 현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로드릭 교수의 통찰이 중국과 북한 이전에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대한민국 ‘시민’ 앞에 놓인 과제고 경향이 독자와 대화해야 할 주제다. 혹시라도 경향이 관행으로 신문을 만들지 않기 바란다. 이해관계가 아닌 인과관계를 따질 줄 아는 시민이 경향의 독자임을 늘 새겼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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