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미디어칼럼+옴부즈만

[문화비평]‘냉소’가 아닌 ‘연대’가 필요한 시대

매일 마주하는 뉴스 속 우리의 현실은 우울하기만 하다. 점점 각박해지는 현실에서 과연 우리는 ‘자존감’이라는 것을 갖고 살아갈 수 있을지 의문이다. 공사 현장에서 지게차에 깔린 노동자를 구조하기보다는 산업재해를 은폐하기 위해 구급차를 돌려보낸 회사, 자신의 제자를 정신적·신체적으로 학대한 교수, 대기업 회장의 ‘황제노역’ 그리고 비정규직 문제와 일방적 해고 통보의 부당함을 알리려 고공농성을 하는 파업노동자들.

최근 기사에서 보듯이 인간이 인간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 약자를 멸시하는 것이 일상화된 우리 사회의 모습은 위태하고 위험하다. 그리고 그 사회 속에서 살고 있는 ‘나’ 역시 언제든지 약자를 멸시하는 괴물이 될 수 있음을 걱정해야 하는 시대가 된 것 같다. 장기화되는 경기불황과 낙오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리고 타인과의 경쟁이 심화되면서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꿈꿀 수 있는 여유를 갖는다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답답한 현실에 대한 고민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통 관심사가 되었다. 그 때문인지, 최근 우리 사회의 억압적이고 비합리적인 상황을 고발하거나 그러한 상황에 놓인 주인공의 삶을 조명하는 드라마와 영화가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재벌 3세의 악행으로 고통받는 약자 편에서 고군분투하는 형사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베테랑>은 개봉 18일 만에 관객 800만명을 돌파했고, 가난을 벗어나고 가족을 돌보기 위해 ‘장소 불문’ 왕진을 나갔던 외과의사의 파란만장한 삶을 다룬 드라마 <용팔이>는 시청률 20%를 기록했다. 이 외에도 노숙인들의 세계를 통해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드라마 <라스트> 역시 이미 큰 호응을 얻었던 웹툰의 인기와 더불어 시청자들의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영화 <베테랑>에 등장하는 재벌 3세의 악행은 뉴스에서 이미 봐왔던 에피소드의 종합편이다. 드라마 <용팔이> 속 주인공이 마주하는 상류사회의 삶도, <라스트>의 주인공이 마주하는 세계도 다르지 않다.

하지만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사람들은 모두 결핍과 문제가 있는 캐릭터라는 것이다. 용팔이라는 예명을 가진 의사 김태현은 실력은 뛰어나지만 근무하는 병원에서 자신을 끌어줄 선배도 없을뿐더러 집안 형편도 좋지 않으며, 밤에는 불법 시술을 하러 다닌다. <라스트>의 주인공은 작전주로 한몫 벌려다 실패해 노숙인으로 살아가는 인물이며, <베테랑>의 주인공 역시 전세금 상승을 걱정해야 하는 가난한 형사다. 이들의 공통점은 정의를 지키려는 신념이 있지만, 돈과 성공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우울한 현실을 포기하고 받아들이기보다는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연대하고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어쩌면 이러한 노력이 현대인들의 마음속에 담겨 있는 진심일지도 모른다.


용팔이 주원_경향DB



19세기 영국의 대표적 작가 찰스 디킨스의 <어려운 시절>에는 메커니즘 속에서 도태된 약자들,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노동자와 상상력이 사라진 사회의 암울한 현실이 잘 나타나 있다.

초등학교 교장인 그래드 그라인드가 외치는 ‘사실’ 중심의 가치관은 사람들을 냉소하게 만들고, (인간적) 감정을 잊게 만든다. 하지만 이러한 가치관으로부터 벗어난 인물인 ‘씨씨’를 통해 온전한 사회를 살아가기 위해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를 보여준다.

지금의 우리 현실도 ‘어려운 시절’이 아닌가 싶다. 약자를 돕기보다는 약자를 멸시함으로써 현재의 내 위치를 지켜내려는 폭력성은 권력자나 재벌들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택배차의 단지 내 진입을 거부하는 아파트, 경비원에게 반성문을 강요한 주민 그리고 위험천만한 보복운전의 행태는 평범한 우리도 언제든 타인에게 폭력을 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여전히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많은 시간을 보내고 노력하는 봉사자들도 많다. 하지만 이런 미담의 주인공들보다 비인간적이고 무책임한 권력자들을 냉소하고 방관할 뿐만 아니라 문제적 상황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는 것 같은 불안감 역시 떨쳐버리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일방적 해고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자살을 선택한 여성 노동자를 구하고, 음모에 의해 죽임을 당할 처지에 있는 여성을 구한 ‘용팔이’, 폭력에 노출된 노숙 노인을 구하기 위해 위험한 상황에 뛰어든 <라스트>의 주인공. 허구의 세계를 그린 드라마일지라도 주인공들의 모습에서 깊은 공감을 하게 된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냉소’의 틀을 깨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천이다. 우리 모두는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보다 나은 세상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씨씨’이기 때문이다.        


이종임 | 고려대 미디어학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