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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칼럼+옴부즈만

[문화비평]무도가요제와 ‘평창쓰레기’

<무도가요제>는 한동안 “평창쓰레기 가요제”로 기억될 법하다. 4만여명이 운집한 화려한 가요제가 끝난 후 참가자들이 무단 투기한 엄청난 양의 쓰레기가 악취를 내며 공연장뿐 아니라 진입로 주변을 순식간에 ‘난지도’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특히 도로에 버려진 쓰레기들이 아침이 되도록 중앙선에 어지럽게 방치되어 이곳을 지나는 운전자들에게 매우 위험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무도가요제>와 관객들을 향한 지역주민들의 실망스러운 의견도 전해졌다. 언론이 보도한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쓰레기 투기는 분명 심각한 상태였다. <무도가요제>를 준비한 제작진과 참가 관객들이 조금만 신경을 썼더라면 충분히 대비할 수 있었던 쓰레기 처리에 대해 어떤 공지나 대책도 마련하지 않았다는 것이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혹시 ‘평창쓰레기’ 사건이 스키 활강경기장을 만들기 위해 가리왕산을 훼손한 올림픽조직위원회에 항의하는 김태호 PD와 ‘무도빠’들의 고도의 반어적 살신성인 퍼포먼스는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아니면 생태적 동계올림픽의 의미를 알리기 위해 극단적 플래시몹 행동을 기획한 것일까. 어쨌든 <무도가요제>는 평창쓰레기 사건으로 청정 자연을 자랑하는 평창과 클린 환경을 외치는 평창 동계올림픽을 제대로 홍보했거나 욕보였다.

많은 사람들이 평창쓰레기 사건을 개탄하며 시민의식, 공중도덕이 실종된 무도가요제 관객들을 질타했다. 일각에서는 ‘무도빠’들을 ‘무도충’에 비유하며 이들의 무개념 이기적 행동을 비난하거나, 공연 제반 사항을 소홀하게 준비한 <무도가요제> 제작진을 질타했다. 그런데 이번 사건이 단지 관객들의 공중도덕 실종이나 제작진의 준비 소홀만의 문제였을까.



‘영동고속도로가요제’가 13일 오후 강원도 평창군 알펜시아리조트 스키 점프대에서 열린 가운데 관람객들이 입장하기 위해 줄을 서있다._경향DB


물론 평창쓰레기 사건의 표면적인 원인은 관객들의 공중도덕 실종과 제작진의 준비 소홀에 있다. 사전에 대비했더라면 충분히 이런 사태는 막을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사전 대비가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무도가요제> 제작진은 이미 가요제 이틀 전부터 행사장 앞에서 진을 치고 있는 하드코어 ‘무도빠’들의 소식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공연 중 우천으로 인해 쓰레기가 많이 나올 것이라는 것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적어도 공연 전, 공연 중, 공연 후에 쓰레기를 버리지 말고 각자 수거해 가라고 공지를 했을 법도 한데, 현장에 간 사람들의 얘기로는 그런 공지를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 물론 곳곳에 쓰레기 수거대가 추후에 비치된 것도 없었다고 한다. 공연장과 도로에 버려진 쓰레기들은 단지 우비, 식음료병만이 아니다. 컵라면, 치킨, 피자를 비롯한 각종 음식물 쓰레기, 일회용 돗자리와 과자 봉지, 여기저기 널브러진 가요제 홍보 안내판…. 이는 마치 외계인의 습격을 받은 지구 재난 사태 이후의 풍경을 보는 듯하다. 제작진은 아마도 멋진 공연무대만, 출연진은 화려한 퍼포먼스만, 관객들은 무도가요제를 향한 맹목적 환희만을 생각한 것 같다. 모두가 가요제에 미쳐 있었다.

인간들이 먹고 마시고 싸고 그냥 바닥에 버리고 간 쓰레기들을 보면서 이 풍경이 이번 <무도가요제>에서 거북하게 느껴진 것들과 병치된 것은 나만의 감정일까. 초심을 잃고 갈수록 화려함으로 치장하려는 제작진의 규모의 경제학, 가요제는 무조건 신나고 즐거운 사운드만이 진리라고 외치는 <무한도전> 고정멤버들의 노골적인 환락주의의 파편들은 마치 공연장 안과 밖에서 관객들이 먹고 버린 쓰레기들의 양태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화려한 무대 스케일은 거대한 쓰레기 풍경과 역설적으로 짝을 이룬다. 하나는 멋지고, 다른 하나는 더럽게 보이지만, 분출되는 욕구의 충동은 똑같다. EDM이란 전자적 사운드는 흥건히 놀고 싶은 ‘무도빠’들의 문화적 페티시즘을 자극하는 감각이 되었다. 이것이 ‘무도빠’들이 이번 가요제에서 박명수를 싫어하지만 거부하지 않은 이유다. <무한도전>의 김태호류의 자유주의와 ‘무도빠’들의 문화적 페티시즘은 “생산과 소비”라는 예능의 장에서 동일한 공모의식을 갖는다. 어느 힙합 가사처럼 “너와 나의 연결고리”, 그것은 자유를 가장한 감각의 전체주의를 향한 공모의식이다. 이 공모의식이 평창쓰레기 사건을 야기한 원인이다.

전자적 샘플링과 일렉트로닉 사운드가 지배하는 <무도가요제>의 음악적 편중은 마치 알랭 바디우가 바그너의 음악을 보면서 음악숭배, 혹은 음성제국주의를 간파한 의도와 유사한 맥락을 갖는다. 평창에 버려진 쓰레기는 <무도가요제>가 애타게 욕망하는 전자적 소음에 대한 알레고리다. 이른바 <무도가요제>를 지배한 ‘일렉트로닉 노이즈’는 말 그대로 사운드를 소음으로 변환시켜, 날카롭고 전체화하는 신경증을 양산한다. 그러니 사운드의 감각들을 더 전체화하기 전에 <무도가요제>는 이제 소위 “평창쓰레기 가요제”라는 오명을 뒤로하고, 그만했으면 한다.


이동연 |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