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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칼럼+옴부즈만

[문화비평]‘재벌 스캔들’ 과소비 시대

롯데그룹 왕자의 난, 삼성가의 사도세자…. 요즘 재벌 관련 뉴스 헤드라인을 보노라면 왕조사극의 부제로 보일 지경이다. 실제 다루는 방식도 드라마 관전기나 다름없다. 창업주 시대부터 3세대로 이어져 오는 동안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는 재벌가 가계도와 인물관계도를 동원한 배경 설명은 기본이다. 롯데 경영권 분쟁 보도는 한·일 양국을 넘나드는 거대한 스케일의 ‘궁정 쿠데타’로, 이맹희 CJ 명예회장 사망 뉴스는 한 편의 애잔한 왕실비극으로 ‘묘사’된다.

다른 한편에선 재벌들의 ‘갑질’에 대한 기사들이 역시 막장드라마 감상 후기처럼 쏟아진다. 지난해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 회항’ 사태가 전 국민적 이슈가 된 뒤, 올 초 LG그룹 재벌 3세 구본호의 건물주 갑질, 동아제약 후계자 강정석의 주차장 갑질까지, 이를 보도하는 기사들은 대부분 막장드라마의 클리셰같이 진부하고 일차원적 폭로에 그치고 있다. 일례로 강정석 사건 보도를 보면 “페라리 타고 온 사장님의 분노”라는 표현으로 “슈퍼카”임을 강조해 계급 콤플렉스를 자극한다거나 연예 스캔들 기사처럼 누리꾼 반응을 모아 전하는 식이다.

2013년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남양유업 사태, 포스코 라면상무 사건 등 일련의 국내 ‘재벌 스캔들’을 보도하면서 부쩍 잦아진 공론화의 배경부터 재벌들의 오랜 사업 관행의 문제점과 그것을 개선하기 위한 정책 현황까지 상세히 분석해 화제가 된 바 있다. 이와 달리 국내의 ‘재벌 스캔들’ 보도는 심층적 원인 분석이나 대안 제시와는 거리가 멀고 갈수록 가십에 가까워지는 모양새다. 올 초 한국언론진흥재단이 국민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갑질’ 관련 설문조사에서 과반수가 언론 보도가 ‘피상적이고 선정적’이라고 지적한 문제점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를 확인시키는 단적인 사례는 대중에게 연예 파파라치 매체로 더 잘 알려진 소위 ‘신개념 종합지’ ‘더팩트’의 ‘이건희 회장 병상 투혼 포착’ 기사다. 지난 6월 초 이건희 사망설을 직접 확인한다는 취지 아래 삼성서울병원 VIP실을 망원렌즈로 촬영한 기사는 사회적 반향을 이끌어냈다며 상까지 받았다. 하지만 그 폭발적 관심에는 특유의 몰래카메라를 보는 듯한 취재 방식으로 국내 최대 재벌가의 비밀스러운 사생활을 엿봤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전부터 언론에서는 이 회장 병실이 특실 중의 특실이며, 호텔로 치면 로열 스위트룸이라는 기사들로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한 상태였다.



배우 주원이 출연하는 SBS 드라마 '용팔이'_경향DB


뉴스만이 아니다. 재벌 빼면 할 얘기가 그다지 많지 않은 드라마계도 ‘재벌 스캔들’을 적극적으로 소비 중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올해 SBS는 <상류사회>, <가면>, 최근의 <용팔이>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최상위 0.1%의 뒷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을 연이어 내놓으며 드라마 시장에서 꾸준히 동시간대 시청률 수위를 유지하고 있다. 그 비결은 재벌가의 은밀한 속살 안으로 점점 더 깊이 파고들어 가는 이야기에 있다.

특히 요새 최고의 화제작 <용팔이>는 이건희 회장 병실을 연상시키는 VIP 병동을 배경으로 삼아 눈길을 끈다. 시작부터 모 재벌가 관련 루머들을 모티브로 한 에피소드가 등장했다. 국내 굴지의 재벌기업 외동딸 한여진(김태희)은 집안이 반대하는 연인과 사랑의 도피 중에 경호차량과의 추격전으로 교통사고를 당한다. 연인을 잃은 그녀가 아버지 앞에서 투신자살을 시도하고 식물인간이 된다는 것이 극의 출발이다. 더 나아가 실은 여진이 철통 보안의 특실에서 강제로 식물인간 상태를 유지 중이고 외부에는 의식이 있는 상태로 홍보된다는 설정 역시 이 회장 사망 루머를 변주한 듯한 인상을 준다. 연일 최고 시청률을 경신하는 비결 중에는 이처럼 재벌드라마의 새로운 ‘제한구역’을 과감하게 파고든 점이 작용할 것이다.

‘재벌 스캔들’ 과소비 시대다. 속살로 파고들수록 아이러니하게도 재벌의 구조적 문제는 가려지고 선정적 풍경만 남는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에도 소비시대의 최종 수혜자는 재벌이 될 것이다.


김선영 |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