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은 돈을 들여 언론에 광고를 한다. 사람들이 전단으로 나눠 준 광고보다 언론에 실린 광고를 더 믿기 때문일 것이다. 즉 언론의 수익(광고)은 언론의 신뢰성에 기반을 둔다. 언론이 진실을 보도하는 것은 당연히 사회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지만, 언론 스스로에게도 이익이 되는 일이다. 신뢰할 수 있는 저널리즘 행위가 광고의 가치를 높이기 때문이다. 대중지보다 권위지의 광고 단가가 높았던 것도 그런 인식 때문이었다. 하지만 근래 들어 수익 창출에 목맨 언론들이 보여주는 행태는 이런 기본 원리에 역행한다.
방송법은 73조 1항에서 방송사업자는 방송광고와 방송프로그램이 혼동되지 아니하도록 명확하게 구분하라 했다. 또 어린이 프로그램에서는 대통령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반드시 광고임을 밝히는 자막을 표기하도록 했다. 어린이들이 프로그램과 광고를 혼동하여 현혹되지 않도록 하는 안전조치다. 프로그램인지, 광고인지 구분이 안될 때 단기적으로는 효과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청자들이 ‘광고’ 프로그램임을 깨달은 이후에도 그 프로그램을 계속 볼지 의문이다. 그래서 장기적으로는 손해다. 프로그램과 광고를 구분하라는 것은 일면 언론을 위한 안전조치다.
‘신문 등의 진흥에 관한 법률’도 제6조 제3항에서 신문·인터넷신문 독자가 기사와 광고를 혼동하지 아니하도록 명확하게 구분해 편집해야 한다 했다. 하지만 신문에는 기사형 광고라는 것이 있다. 기사의 형태를 흉내 낸 광고다. 광고보다 기사를 더 신뢰할 수 있다는 세인의 인식에 기반을 둔 광고 전략(?)이지만, 만약 기사형 광고의 존재 때문에 아예 기사 그리고 신문사를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돼도 광고 효과가 유지될까? 신뢰 감소로 매체 접근이 줄어드는 현상은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사실 지금 그런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지금은 기사형 광고를 넘어 심지어 광고성 기사까지 만연해 있다. 형태 유사성을 넘어, 기사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광고를 한다. 최근 뉴스타파가 보도한 GPTW(Great Place To Work) 사건도 그 한 유형이다. 조선일보, 매일경제, 한국경제는 ‘일하기 좋은 100대 기업’ 관련 기사를 내보냈다. 이 시상을 주관하는 단체는 응모 때 기업으로부터 돈을 받고, 응모한 모든 기업을 시상대상자로 정했다. 시상식 때 참가비도 받았다. 그리고 언론은 돈을 받고 관련 기사를 다뤄 기업들을 홍보했다. 3개 신문사의 기사는 그런 ‘홍보’기사였다. GPTW 관련 기사만은 아니다. 신문들은 매년 다양한 평가 단체의 심사 결과를 기사화하고, 독자들은 인접된 기간과 지면에 수상 관련 기업의 광고가 실리는 것을 보게 된다.
2015년에는 MBN 미디어렙 직원의 업무일지 내용이 폭로되어 파문이 일었다. 건강 프로그램에 소개된 생활정보는 그와 관련된 제품을 홍보하는 것이었고, 소개된 제품은 인접한 시간대에 홈쇼핑에서 판매되고 있었다. 심지어 효과를 높이려고 경제 뉴스 프로그램에 소개까지 하였다. 이런 현상은 사실 MBN만의, 종편만의 일도, 방송에 한정되는 일도 아니고 거의 모든 매체에 만연된 현상이다. 수용자들이 이런 행태를 보이는 언론들을 더 이상 신뢰하기는 쉽지 않다. 물론 우리 현실에서는 정권의 언론 장악이나 정파적 언론의 행태로 더 신뢰가 떨어진 것은 분명하지만, 광고와 기사의 경계를 무너뜨린 언론의 행태가 언론 신뢰를 갉아먹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된다. 기존 매체는 이용 측면에서 새로운 플랫폼보다 불편하다. 그러니 수용자가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신뢰할 수 없는 언론의 충성 수용자층으로 남을 이유는 없다. 광고주로서는 기존 매체 신뢰가 감소할 바에야 아예 이용자들을 속이기 쉽고, 효과도 직접적이고 그 결과를 즉각 확인하기 쉬운 인터넷(모바일) 매체로 옮겨가는 게 더 합리적이라 판단할 것이다. 단기적 효과에 매몰되어 지금의 행태를 지속하는 것은 언론의 생존을 위협하는 일이다.
아마 뜻 있는 언론인들조차도 이미 언론계의 관행으로 자리 잡은 이런 행태를 거부하기 힘들다 생각할지도 모른다. 호랑이 등에서 뛰어내리는 위험을 감수할 자신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리지 않으면 더 위험한 상태에 처할 것이다. 언론의 공멸! 개인이나 개별 언론사로서는 힘들다. 그 기준과 한계를 결정하려는 언론계 공동의 고민과 노력이 필요하다.
<김서중 성공회대 교수·신문방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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