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엄지영은 자신을 드러내면서 인터뷰를 한 이유로 자신에게 배우고 연극계에 진출하는 학생들에게 유사한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고 밝혔다. 서지현 검사 역시 더 이상 미래의 가해자가 생기지 않길 바란다는 말을 남겼다.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미래에 대해 언급한 것은 과거의 악행이 정의롭게 처벌받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의 성차별과 성폭력 문제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인식에서부터일 것이다. 과거의 문제를 덮어버린 것이 개인에게 고통이 될 뿐 아니라 이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구조적 차별로 기능하고 있다. 이를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미래 역시 뻔하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이 문제를 지금 해결해야만 한다.
마로니에 공원에 모인 관객들 “공연계 성범죄자 퇴출” 공연계 ‘미투(MeToo)’ 운동을 지지하는 관객들이 25일 오후 성범죄자가 참여한 작품을 소비하지 않겠다며 서울 종로구 마로니에 공원에서 ‘연극뮤지컬 관객 #위드유(WithYou) 집회’를 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이러한 인식이 지니는 중요성을 고려한다면, 연일 이어지는 증언과 폭로를 보도하는 언론 역시 이를 세심하게 다룰 필요가 있다. 어디에서 “또 터졌다”는 식으로, 피해자의 폭로 내용이나 이에 대한 가해자의 변명만을 앞다투어 실어 나르는 데 집중해서는 안된다. 보다 근원적으로 이 문제의 해결 과정과 결과를, 그리고 제도에 대한 요구와 미래의 변화를 위해 필요한 것에 대해 초점을 맞추는 진중한 보도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러나 보도량이 많아지면서 일부 언론 보도의 문제점도 나타나고 있다. 사안을 가해자의 말과 피해자의 증언 간의 진실 공방처럼 만들어서 시시각각 속보를 내보내고, 이에 대한 누리꾼 반응을 살피고, 이를 다시 기사화하는 행태가 대표적이다. 또한 여러 차례 반복해서 비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선정적인 태도로 ‘어떻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에 주목하여 헤드라인을 뽑는 일도 자주 발생하고 있다. 포털을 통한 뉴스 소비가 일상화된 환경에서, 성폭력과 관련된 가해자의 행위 자체를 선정적인 헤드라인으로 뽑아 클릭을 유도하는 것은 언론의 공적 책임을 무시한 태도로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이 문제에 대해서라면 “언론은 성폭력 범죄의 범행 수법을 자세하게 묘사하는 것을 지양해야 하고, 특히 피해자를 범죄 피해자가 아닌 ‘성적 행위의 대상’으로 인식하게 할 수 있는 선정적 묘사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성폭력 범죄 보도 가이드라인이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성폭력 범죄와 관련하여 선정적 묘사를 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이것은 범죄일 뿐 성적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한 인식이 없는 사람들은 섹스 스캔들이나 성추문과 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이 폭로와 증언 활동이 오용된다거나 선동에 이용될 가능성을 경계해야 한다는 등의 말을 하며, 여성들의 피해를 인정하지 않거나 심지어 남성들의 성생활에 대한 사적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면서 분노하기도 한다. 언론은 이와 같은 성차별에 근거한 사회 통념을 단순 보도를 통해 재확산하는 것이 아니라, 성평등한 미래를 위한 대안을 논의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는 데 좀 더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물론 최근에 좀 더 ‘미래’에 초점을 맞추는 보도가 많아지고 있는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성폭력 범죄의 구조적 문제에 집중하고 법과 제도를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들이 등장하고 있다. 성폭력 관련 우리나라 법을 살펴볼 때, 강간 범죄에 대한 정의가 여전히 가해자 중심으로 되어 있어 국제적 수준에서 문제가 있음을 확인한 보도,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 문제를 다루면서 피해자에 대한 소문과 통념이 왜 문제가 되는지를 짚는 보도, 이제까지 성폭력 가해자 특히 직장에서의 위계에 의한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법적 처벌이 미흡하므로 문제가 계속되고 있음을 지적하는 보도, 피해자 증언 활동이 애초에 어려운, 구조적 차별과 폭력 문제가 큰 사회 영역은 어디인지를 살피는 보도 등은 언론 본연의 의제 설정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여전히 미흡한 점도 남아있다. 예컨대 피해자에 대한 사회적 통념이 재확산되지 않도록 언론이 좀 더 유념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죄가 남아있는 한국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증언하는 여성들이 가해자의 명예훼손 고소에 따른 법적 공방을 치르게 되어, 또 다른 피해를 입는 사례가 과거에 많이 발생했다. 피해자의 의도를 의심하고 순수한 피해자가 아니라고 비난하거나 근거 없는 소문을 만들고, 외모에 대한 품평을 남기는 무책임한 누리꾼에 의한 피해 역시 큰 고통으로 남는다. 이러한 고통을 감수하면서 실명을 밝혀야만 진정성 있는 사실인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생긴 것은 더 큰 문제이다. 언론이 공개 인터뷰 형식을 차용하면서 이를 부추기는 양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피해자를 보호하는 보도 방식에 대해 좀 더 고민할 필요가 있다.
일련의 위계에 의한 성폭력과 관련된 증언들이 보여준 명백한 결과 중 하나는 능력을 갖춘 여성들이 직장을 떠나거나 자신의 꿈을 포기해야 했다는 것이었다. 성폭력 범죄의 문제는 이렇게 여성의 능력 발휘를 막는 것뿐 아니라, 사적 관계 영역 전체에서 여성의 인권을 침해하는 범죄 행위이다. 언론이 이 점에 대해 더욱 명확히 인식하여 뉴스 가치를 판단하고 보도 방식에 신중을 기해야만 ‘미래’를 향한 증언들이 진정한 문제 해결을 위한 디딤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김수아 | 서울대 기초교육원 강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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