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미디어 뉴스

[미디어 세상]소통과 먼 ‘국정운영 5개년 계획’

새 정부가 추진하는 언론매체 정책을 확인하고 싶었다. 인터넷 검색창에 ‘국정운영 5개년 계획’을 쳐서 국정기획자문위원회가 지난 19일 발표한 보고서 원문을 내려 받았다. 보고서 27쪽에서 언론의 독립성과 공정성 회복을 위한 국정과제를 확인했다. 공영방송 지배구조를 합리적으로 개선하고, 인터넷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겠다는 내용이다. 이로써 2016년 세계 180개국 가운데 70위에 불과했던 언론자유지수를 2022년까지 30위권으로 올리겠다는 다짐도 찾아볼 수 있었다.

 

방송의 공공성 회복과 발언의 자유를 주장하는 나로서는 일단 안도감과 함께 새로운 기대감도 느꼈다. 이대로만 된다면야 얼마나 좋겠냐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계속 보고서를 읽다보니 이내 허전해졌다. 왜 그런지 생각해 보았다. 5대 목표를 정하고, 20개 전략을 도출하고, 100대 과제를 제시하는 방식이 너무 도식적이어서 그럴까. 아니면 과제의 방대한 범위에 비해 내용의 밀도가 떨어져서 그럴까. 보고서를 이리저리 넘겨보다 깨달았다. 내용보다 형식의 실패다. 글쓰기 양식에 결함이 있다. 이른바 ‘개조식’ 글쓰기로 이런 중요한 내용을 담아내려는 시도가 무리라 보았다. 개조식 글쓰기란 우리나라 공무원이 공문서 작성에 사용하는 특유의 관료주의적 글쓰기 방식을 말한다.

 

국립국어원의 박용찬 연구원에 따르면, 개조식이란 용어 자체는 아마도 일본어의 ‘항목으로 나누어 쓰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공문서를 지배하는 개조식 글쓰기는 명사형으로 문장을 마무리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문장을 명사구로 대체하면서 동시에 많은 것을 갖다 버린다. ‘국정운영 5개년 계획서’에 등장하는 사례만 보더라도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있다.

 

첫째, 주어가 분명치 않다. 문장을 명사구로 대체하면서 주술관계가 모호해지는 경우가 있다. ‘임무를 수행’ ‘시간 미확보’ ‘연속성 확보를 위한 수단’ 등과 같은 표현의 경우, 누가 수행하는지, 누가 확보하지 못했다는 것인지, 그리고 무엇이 수단이라는 것인지 불분명하다. 물론 맥락을 살피면, 주어를 복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식의 모호함은 대체로 불필요한 오해를 초래하며, 때로 심각한 책임회피의 방편처럼 보인다.

 

둘째, 문장의 기능이 명료하지 않다. 예컨대, ‘관행에서 탈피’라고 마무리한 구절에서 ‘탈피’하는 행위가 과거 사실에 대한 관찰인지, 현재 행위에 대한 보고인지, 아니면 미래 실천에 대한 약속인지 애매하다. 애초에 명사형 어미의 시제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지만, 문장의 기능이 애매한 채 남아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역시 맥락을 살펴서 의미를 추론할 수 있다. 그러나 추론을 통해서만 명료하게 의미를 복원할 수 있다면, 공문서로서는 실격이다.

 

셋째, 문장 간 논리적 연관성을 확인하기 어렵다. 문장 앞에 붙어 있는 네모와 동그라미, 그리고 이음표는 문장의 위계를 암시한다. 그러나 서로 다른 층위에 있는 문장 간의 관계는 물론 같은 층위에 있는 문장들 간의 관계도 모호하다. 독자는 앞 문장에서 이어진 다음 문장이 순접인지 역접인지, 부연설명인지 제한조건인지 짐작도 못한 채 읽어가야 한다.

 

내가 보기에 개조식 글쓰기의 가장 큰 결함은 격조가 없다는 데 있다. 문장의 내용이 명료하지 않은 것도 문제지만 내용을 전달하는 형식과 태도도 천하다. 비유컨대, 귀한 손님에게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모셔놓고 단백질과 비타민 복합제를 종이봉투에 담아 건네는 식이다.

 

이는 정부부처 간 메모를 교환할 때 채택할 수는 있어도, 정부가 국민을 상대로 정책적 소통을 하겠다면서 사용할 글쓰기 양식은 아니다. 국민 주권시대를 선언하고 실질적 주권자인 국민에게 진정성 있게 소통하겠다는 정부가 국민 앞에서 향후 5년을 다짐하면서 사용할 글쓰기 양식은 더욱 아니다.

 

나는 미국이나 영국 정부가 언론매체 정책에 대해 발표한 보고서를 읽을 때마다 정말 많이 배운다. 국제환경과 내부 정세에 맞춰 적절하게 제시하는 정책 과제도 흥미롭지만, 그런 과제를 실현하기 위해 동원한 당대 정부의 주장과 제언이 교묘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정부의 정책적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논변이 얼마나 정연하고 또한 품격이 있는지 확인하면서 감탄한다.

 

예컨대, 영국 문화매체부가 BBC 방송 면허를 갱신하면서 내놓는 백서를 읽어보라. 또는 미국 연방통신위원회가 망 중립성 정책을 추진하면서 업데이트하는 보고서를 읽어보라. 정부부처의 공문서가 행정부 수반의 기념식 연설만큼이나 감동적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보고서 작성은 정부부처가 정책을 공표하고 설득을 구할 때 사용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이며 정교한 소통 방법이다. 개조식으로 쓰는 보고서는 효율성과 정교함을 극단적으로 추구하지만, 과연 의도한 효과를 내는지 의심스럽다. 결국 나는 공무원의 개조식 글쓰기가 일제 관료의 잔재라는 이유로, 또는 관료적 권위주의 때문에 강화된 관행이라는 이유로 반대하는 게 아니다. 개조식 글쓰기는 애초에 의도한 소통을 하지 못하고 역효과를 초래할 우려가 있기에 경계할 뿐이다.

 

이준웅 |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