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폭염이다. 일에 집중하기 어려운 것은 물론 심지어 쉬는 것도 힘겹다. 좀 심하게 표현하면 만사가 짜증스럽다. 그런데 언론을 보면 더 한숨이 나온다. 안타까운 사건 사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정부패,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들의 비인간적 행위 등 언론이 전달하는 소식은 필요하지만 온전한 정신으로 보기 어렵다. 간간이 전하는 미담에 마음이 흐뭇해지고 감동으로 가슴이 촉촉해지는 순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언론이 미담만으로 그 기능을 다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세상을 감시하는 본질적 기능을 수행하지 않는 언론은 존재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수용자에게 매일 불편한 마음을 감수하며 언론을 읽어달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언론이 답답한 현실을 전달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수용자가 불편함만을 느끼지 않게 하려면 언론은 이를 헤쳐 나갈 수 있는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 수용자의 속이 뻥 뚫리는 해법까지는 아니어도 해법을 고민하고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전달해야 한다. 언론이 단순 고발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제반 의견을 모으고 논의해 해법을 찾아 나갈 수 있는 공론장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시민들이 답답한 현실을 이겨 나가기 위한 단비 같은 구실을 해야 한다.
최근 정의당 노회찬 의원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꼭 그런 선택이어야 했느냐는 안타까움은 있지만, 진보정치인에게 요구하는 높은 도덕적 기준을 인정해야 한다고 했던 정치인으로서, 노회찬 의원이 지켜야 했던 최소한의 자존감의 발로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 후 노회찬 신드롬이라 불릴 정도의 현상이 나타났다. 노회찬 의원이 속했던 정의당의 지지도가 지속적으로 상승했다. 대부분의 언론이 노회찬 의원이 이루고자 했던 진보정치의 꿈을 언급하고, 노회찬의 꿈을 좌절시킨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보도를 내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답답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본질인 선거제도 개혁은 여론의 장에서 보면 주변부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선거제도가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는, 즉 대표성에 충실한 제도가 아님은 다 안다. 하지만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민의를 충실히 반영할 권역별 연동형 비례대표제 얘기를 꺼냈을 때도, 노회찬 신드롬이 나타난 지금에도 언론은 본질인 선거제도 개혁을 공론의 장에 올리지 않는다.
최저임금제는 뜨거운 감자가 됐다. 최저임금제를 다루지 않은 언론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정부로부터 자영업자에 이르기까지 답답한 현실을 토로하는 이해당사자들의 이야기가 지면을 장식했다. 하지만 최저임금제는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에서 비롯한 열악한 현실을 살아가는 한국 빈곤층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최소한의 대책이고, 또 불평등한 경제구조의 해법이 동시에 진행됐어야만 하는 문제다. 그럼에도 언론은 을과 병, 아니 병과 정의 갈등만을 부각시켰다. 최저임금제 보도를 접한 독자들이 답답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언론은 해법을 몰랐을까 아니면 회피했을까?
한국의 기존 언론은 위기다. 기술의 변화가 중요한 요인이다. 사람들이 뉴스나 콘텐츠를 보는 매체가 기존 매체에서 모바일로 이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요인은 신뢰성의 상실이다. 정치적 이유로 편파적이었던 언론의 행태는 신뢰성 상실의 매우 중요한 근거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인터넷의 정보와 별반 다르지 않은 기존 언론의 기사 수준 또한 신뢰성을 추락시켰고 수용자들이 기존 언론에서 멀어지게 만든 이유다. 좋은저널리즘연구회가 ‘우수 저널리즘을 위한 프로젝트’에서 제시한 고급 기사요건(취재원의 투명성과 다양성)을 가지고 한국, 미국, 영국, 일본의 대표 일간지들을 비교해 보았다고 한다. 연구결과 한국 언론은 모든 면에서 질적 수준이 낮았다는 것이다. 기사도 짧고, 해설·분석 기사도 적고, 취재원도 투명하지 않고 다양성도 부족하고. 매체 기술의 변화 요인을 논하기 이전에 기사의 질만을 따져봐도 수용자들이 기존 언론을 이용할 이유가 없다고 결론을 내려도 되지 않을까?
상품이 마음에 안 들면 구매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언론은 그런 상품이 아니다. 언론은 민주주의의 작동기제이다. 제반 권력의 감시 없이 민주주의가 작동할 수는 없다. 언론이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다. 그런데 수용자에게 생존을 구걸하지 않고 ‘의미 있게’ 생존하려면 언론은 스스로 본질을 성찰하고 그에 걸맞게 변화해야 한다. 특정 정파나 사주의 성향을 대변하는 정파성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은 물론 기사의 질을 높여야 한다. 기사의 질을 높이려면 사건의 단순 전달을 넘어서 더 분석적이고 더 다양한 관점을 제시함으로써 이해를 도와야 한다. 소위 해설 저널리즘으로 나아가야 한다. 더 나아가 해법을 추구하는 언론으로 거듭나야 한다. 한국 언론은 사건 ‘정보지’ 같다. 기사 속에 현상은 있지만 본질도 그리고 해법도 없다. 전문성을 지닌 기자들의 집약된 노동의 결과로서 해법 저널리즘이 언론 위기 극복의 답이 아닐까?
<김서중 | 성공회대 교수·신문방송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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