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는 이런 법도 있다. 모두 그 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데, 그 법으로 처벌받은 사례가 없다. 모두가 그 법은 죽었다고 하면서도, 정작 땅에 묻지는 않는다. 심지어 그 법을 적용하지 않아도 좋은 이유를 별도로 만들어 죽은 법을 되살리려 한다. 혹은 이도저도 안되니 법과 현실이 따로 노는 현실을 내버려 두고 각자도생이다.
피의사실공표죄 이야기다. 형법 제126조는 검찰과 경찰 등 범죄수사를 하는 자가 직무상 습득한 피의사실을 공판청구 전에 공개하면 처벌할 것을 명령한다. 그러나 이 법으로 기소된 검사가 없고, 이 법을 의식하며 기사를 쓰는 기자도 없다. 공중도 마찬가지다. 누구도 이 법이 제대로 작동해서 수사 단계에 있는 공인의 중대한 범죄혐의에 대해 정보를 얻지 못하게 되는 사태를 원하지 않을 것 같다.
피의사실공표죄의 실효성을 둘러싼 시비는 ‘조국정국’으로 다시 불거졌지만,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논두렁시계 사건’에도 문제였다. 때마다 검찰은 내부적으로 공보준칙을 정비하고, 언론은 검찰출입 기자단 운영 관행을 개혁하겠다고 했다. 이번에도 그렇다. 그러나 앞으로도 정치적 파장이 있을 수밖에 없는 사건들, 특히 공인이 관련한 대형 사건에 대한 보도에서 피의사실공표가 다시 문제될 것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헌법학자 문재완은 다른 나라에서 이런 무차별적 공표금지법을 찾아볼 수 없는 일이 우연이 아니라 했다. 사회적으로 중요한 사안에 대해 누가 어떤 이유로 범죄혐의를 받고 있는지 알아야 할 공중의 이익을 제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피의자의 인격권을 보호하겠다는 애초의 입법취지를 인정하더라도, 충돌하는 다른 기본권에 대한 침해를 고려하지 않고, 또한 인격권을 보호하기 위한 별도 조치도 고려하지 않은 채 전면적으로 표현을 금지하는 법은 과도하며, 따라서 위헌적이라고 평가했다.
나는 피해사실공표죄를 둘러싼 논란이 주로 이 법의 보호법익을 둘러싼 법리 공방에 머무는 현실도 기이하다고 본다. 정작 중요한 요점만 빼놓고 변죽을 울리는 느낌이다. 제도 자체에 내재한 모순이 엄연한데, 그 제도를 어떻게든 유지하려는 논변들이 그렇다. 법을 준수해야 할 당사자가 곧 그 법을 적용해서 기소하는 권한을 독점한 자라는 현실을 그대로 둔 채, 아무리 법무부 훈령을 정비하고 위법성을 면제하는 조건들을 정해봤자 뭐가 달라질까. 언론이 수사기관과 사실상 합작해서 여론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으로 범죄혐의를 공개하는 관행을 비판하는 논지가 신랄하다. 이 비판에 대해 검찰 출입기자 쪽에는 얼마든지 이유 있는 항변을 할 수 있고, 수사기관 쪽은 당연히 사정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런데 비판의 요점은 언론과 검찰 간 ‘좋은 관계’를 문제 삼는 데 있는 게 아니다.
선별적인 피의사실공표로 인해 여론형성 과정이 왜곡됐다. 이를 눈치챈 공중이 이제는 검찰발 단독보도라며 터지는 뉴스를 의심 없이 보기 어렵게 됐다. 따라서 이 관행을 유지함으로써 수사보도에서 편의를 얻은 쪽이 언론이지만, 이 관행 때문에 결국 손해를 본 피해자도 언론이다. 공중의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관행을 자책하고 개선하고자 하는 언론의 목소리는 정당하다.
그러나 경찰과 검찰 출입기자의 취재와 보도관행을 개선하기 위해 정부가 나서야 한다는 식의 주장은 확실히 이상하다. 예컨대 검찰이 기자실을 폐쇄해야 한다는 주장이 그렇다. 관행에 편승해서 이익을 추구한 권력기관에 개혁을 요청하다니. 언론이 주도적으로 나서도 될까 말까한 개혁의 문제를 권력기관의 도움을 받아야만 해결할 수 있다고 인정하다니.
피의사실공표죄 논란에서 나는 우리 사회의 주요 권력집단 간에 이루어진 ‘좋은 관행’이 결국 어떻게 제도 자체를 훼손하는지 본다. 이미 훼손한 정당성과 공정성을 회복하기까지는 훼손과정보다 긴 시간과 큰 노력이 필요할지 모른다. 그러나 회복은 전면적인 반성과 발본적인 개혁으로 시작해야 한다. 피의사실공표죄를 폐지해야 한다. 언론은 공인의 범죄혐의를 수사기관의 도움을 받건 말건, 두려움 없이 그러나 공정하게 보도해야 한다.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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