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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칼럼+옴부즈만

비판의식보다 진실보도가 우선

한동섭 | 한양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지난해 런던올림픽 폐회식 무대는 영국기인 유니온 잭을 영국신문들로 가득채운 모습으로 형상화되었다. 세 시간가량 진행된 폐회식 내내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었던 신문은 영국인들의 일상과 사회적 삶이, 적어도 그들의 사회적 소통이 신문과 떼어낼 수 없다는 사실을 은유했다. 영국인들의 신문에 대한 유난스러운 자랑이 과장스러워 보이기도 했지만 그들에게는 세상에 대놓고 자랑할 만한 권위지(quality paper)들이 있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견이 있을 수는 있겠으나 신문학 교과서에 국내 신문들 중 어느 것을 권위지로 분류한 내용을 아직은 발견할 수 없다. 그렇다고 우리 신문이 가십거리나 주워 섬기는 대중지 수준이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느 나라 신문 못지않게 정치, 사회, 경제기사 등 경성뉴스가 많고 비판적 문제의식으로 넘쳐난다. 문화적으로도 풍부한 읽을거리를 제공하는 신문도 많다. 문제는 비판의식과 정치성향이 과도하게 표출되고 있고 이에 상업신문으로서의 특성까지 더해져 진중한 사회적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3월18일 경향신문 1면 (경향신문DB)



경향신문도 일정 수준 이러한 문제점을 나타낸다. 무엇보다 비판의식이 앞선 나머지 진실보도의 원칙이 흔들리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장관 후보자들에게 투기의혹이 있거나 경력상 의혹이 있다고 판단된다면, 그것을 증명할 충분한 증거를 찾을 때까지 기다려 기사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의혹이 있다”는 수준의 내용을 1면 머리기사로 올리는 것은 진중한 보도라 하기 어렵다. ‘논란’이 있다는 기사는 후보자가 적격하지 못하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하지만 적격성 여부는 사실관계로 검증하는 것이지 논란 여부로 검증하는 것이 아니다. 장관 후보라는 사안의 엄중함 때문이라 한다면, 그렇기 때문에 더욱 진중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언론의 기능은 여론정치가 아니라 진실을 보도하는 것이다.


스트레이트 기사에 기자의 의도가 확연히 드러나는 기사도 많다. 익명의 정보원을 달고 “지적이 나온다”, “시선이 곱지 않다”라 하며 세간의 평을 전하기도 한다. 윤리적인 공직자가 임명되기를 바라는 기자의 선의를 유추할 수는 있으나 사실관계에 충실해야 하는 스트레이트 기사의 기능을 다했다고 할 수는 없다.


보궐선거보도는 여전히 경마저널리즘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한다. 정책에 대한 관심은 전혀 보이지 않고, 얼굴 보이고 허리를 굽히는 선거캠페인의 모습을 재현하기 시작했다. 선거결과 나타날지도 모를 정치권의 지각변동에 대한 관심이 지면 곳곳에서 드러난다. 지역정치의 중앙정치화 경향이 더욱 강한 이번 선거의 경우 선거구에 관한 기본적 정책대결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지역에서 당선된 국회의원이 중앙정치무대에서 활약하기를 기대하는 유권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에 합당한 정책대결이라도 이끌어내는 것이 책임 있는 선거보도의 기본이다.


성급한 보도에는 언제나 여론재판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학교폭력은 언론이 관심을 가져야할 일이지만 관련자들 대부분이 미성년자라는 사실만으로도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피해자의 진술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가해자로 지목된 학생들에 대해서도 재판이 끝나기 전까지는 무죄 추정을 하는 것이 수사와 재판의 원칙이자 저널리즘의 원칙이다. 경찰조사 중인 사건에 대해 사실로 확인된 것 같은 제목을 달고 몰아붙이듯 기사를 쓰는 것은 여론재판과 다름이 없다. 신문의 단정적 기사는 사회적 파급력으로 인해 재판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중처벌이라는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


보도 자료를 받아 옮기는 우리언론의 관행은 홍보성 기사를 양산하는 계기가 되었다. 직접 취재보다는 출입처 중심의 취재방식과 기업홍보부서들과의 관계에서 발생한 문제이다. ‘특집’ 등의 이름으로 ‘기사’화하여 이런저런 제품소개로 지면을 채울 경우 신문의 권위는 크게 추락할 수밖에 없다.


종이신문이 위기라 한다. 젊은 세대의 소비양식과 결합한 디지털 미디어는 종이신문에 적잖은 위험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의 위기가 기술적 차이나 세대 간의 다름에서 오는 것이라고만은 말할 수 없다. 종이신문에는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기술적 장점이 여전히 있다. 문제는 왜곡된 저널리즘적 경향으로 인해 종이신문이 저널리즘의 본령이라는 자신의 위치를 지켜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시대, 영국인들은 올드미디어라는 신문을 여전히 그들의 중심 미디어라 자랑했다. 다소 늦고 재미없더라도, 진실을 찾을 수 있고 진중한 논의를 들을 수 있는 기사들이 제공된다면 우리 신문들도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권위지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것은 가볍고 부정확한 정보가 넘쳐나는 디지털시대에 종이신문이 생존할 수 있는 방안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