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입견 버리고 이웃종교에 귀 기울일 때 화해는 싹틉니다”
서명원 신부(54)는 자신의 법명을 ‘천달(天達)’이라고 소개했다. 가톨릭을 말하는 천주교에서 천(天)자를 따고, 스승의 스승인 종달(宗達)노사의 달(達)자를 따 스승인 법경거사가 지어준 법명이라고 했다.
신부가 법명을 받은 것이 이상하겠지만 서 신부는 2005년부터 서강대 종교학과에서 한국 불교를 가르치는 교수이자 예수회 신부다. 본명은 베르나르 세네칼. 프랑스인이다. 1985년 수사로 한국을 찾아 2년을 보냈고, 언어를 배우기 위해 1년 더, 한국인의 생활 속으로 뛰어들기 위해 또다시 2년을 보냈다. 그리고 한국 불교와 성철스님의 말씀에 매료돼 한국 불교에 대한 석·박사 논문을 썼다. 서 신부는 “어떤 분들은 성철스님으로 한국 불교를 배우는 것을 두고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고 말하기도 한다”며 “그러나 성철스님은 제가 그리스도의 경전을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빛을 제공해주었다”고 단언한다.
어떻게 이를 극복할 수 있을까. 지난해 종교편향 논쟁을 지켜본 그가 제시하는 종교 간 화해의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지만 쉬워 보이지는 않는다. “선입견을 버리고 이웃 종교와 서로 다른 점이 무엇인지 발견해 자기 종교를 더 풍요롭게 해야 합니다.” 그는 그리스도교를 진지하게 전문적으로 배우려는 불자들을 만나본 적이 없어 아쉽다고 했다.
‘뼈를 묻을 때까지’ 한국에서 학생들에게 불교를 가르치겠다는 서 신부는 “남아있는 인생 동안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서로를 깊이 사귈 수 있게 노력해야 한다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개량한복을 입은 푸른 눈의 신부가 자신의 법명을 소개하는 모습이 어색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늦둥이 사제의 한국 사랑
-한국에 온 지는 얼마나 됐습니까.
“아직 20년이 안됐어요. 처음 온 것은 1984년도예요. 당시엔 수사였지요. 예수회 한국지구에서 요청이 왔고 맞선을 보듯이 나라가 마음에 드는지 보려고 7주 동안 방문했어요. 제주도 한라산 백록담에 올랐는데 당시엔 여름이라 불법인 줄도 모르고 거기서 수영을 했어요. 이 나라가 마음에 들어 이듬해인 85년 가을부터 90~95년을 빼곤 한국에 계속 있었어요. 올해가 19년째 되는 해예요.”
-왜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됐습니까.
“왜인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왜 여러분이 한국에서 태어났는지, 왜 저는 캐나다 퀘벡에서 태어나서 여기까지 왔는지…. 다 인연이라고 할 수 있지요. ‘우리가 지금 왜 함께 있을까’ ‘왜 바로 여기에 함께 있을까’ 신비하지요. 생각할수록 수수께끼예요.”
-서명원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얻으셨나요.
“86년 서강대 총장이셨던 서인석 신부께서 지어주셨어요. 서씨가 거기서 나왔고요. 명자는 밝을 명(明), 원자는 원천이라고 할 때 원(源)자예요. 순 한국말로는 ‘빛샘’이죠. ‘밝음의 샘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구나’라고 생각했지요.”
-왜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셨나요.
“저는 늦둥이 사제예요. 한국 나이로 마흔이 됐을 때 사제가 됐으니까요. 그 전에는 의대를 6년 동안 다녔습니다. 350구가 넘는 시신을 해부했어요. 생로병사에 대해서 안다면 아는 것이지요. 그런데 의대에서는 치료법은 가르쳐 주지만 왜 아픈지, 왜 죽는지는 가르쳐 주지 않더라고요. 25세 되던 해에 수도 생활을 시작했어요. 그리고 한국말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고, 그 다음엔 이 나라의 문화와 종교에 대해 배워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제 양성과정이 길어진 것이죠.”
-학생들에게 불교와 관련된 과목만을 가르치십니까.
“네. 신학은 가르치지 않아요. 제가 다른 사람에 비해 신학에 대해서 더 많이 알지도 모르지만 제가 가르치는 것은 불교입니다. 이번 학기에 두 과목인데 하나는 ‘수양과 명상’이고, 다른 하나는 대학원생들에게 ‘보조 지눌 사상 연구’를 가르칩니다.”
-‘수양과 명상’은 종교학과 학생들만 들을 수 있는 과목은 아닌 것 같군요.
“종교학과 학생들도 있고 교양과목으로 오는 학생들도 많아요. 불행히도 종교학을 전공하려는 학생이 많지는 않아요. 종교학을 전공했다고 해서 취업이 보장되지 않잖아요. 그렇지만 관심있는 학생들은 모두 착하고, 약삭빠른 사람이 없어요. 종교에 대한 갈망이 있고 삶에 의미를 어떻게 부여해야 할지를 엄청나게 많이 고민하는 학생들이 찾아오니까요.”
-교육자 역할이 어렵지 않나요.
“제가 수도자이기 때문에 각별히 가르치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이론보다는 실천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이론을 무시하지는 않아요. 다만 실천을 위한 이론이어야 살아있는 이론이지 그렇지 않으면 메마른 지혜라고 봅니다. 요즘 학생들이 고민이 많고, 졸업하기가 어렵고, 졸업해도 취업하기 어렵고, 취업해도 좋은 일자리가 거의 없어서 힘들어 하는 것을 많이 봅니다. 자살률이 높아진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고요. 이럴 때에 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지혜가 무엇인지 많이 생각합니다. 가르치는 것이 수행이듯 배우는 것도 수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철스님에게서 그리스도교 경전 해석의 새로운 열쇠를 찾다
-가톨릭 사제로서 불교를 처음으로 접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처음에 한국에 왔을 때는 2년 동안 언어만 배울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서양 놈’이 한국말을 배웠다고는 하는데 아는 게 하나도 없었어요. 그래서 1년 더 달라고 했지요. 그래도 안되겠다 싶어 문화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2년을 더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문화와 종교를 공부했어요. 도교, 불교, 무속신앙 등을 공부했는데 하나를 더 깊이 공부해야겠다 싶었지요. 제가 파고드는 성격입니다. ‘한 우물을 파라’는 속담을 좋아해요. 불교에 상당한 매력을 느꼈고 불교를 택해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서양에 한국 불교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일본 불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불교와의 첫 인연을 기억하시나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사찰에 갔어요. 서인석 신부님이 데려가주셨는데 풍경 소리 있잖아요? 그 풍경 소리, 향 냄새, 목탁 소리, 단청의 색. 이런 것에서 ‘정말 낯선 세계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찰을 방문하고 나서 3일 동안 공에 빠진 듯한 느낌이었거든요. 뭔가 깊이있게 들어오긴 했는데 당시에는 개념을 몰랐기 때문에 그것을 명명할 수가 없었지요. 불교가 매력적으로, 도전적으로, 이국적으로 느껴졌어요. 처음 그렇게 불교와 인연을 맺은 거예요.”
“성철스님이 기독교 경전 새롭게 조명할 개념을 제공했죠”
로만칼라 대신 개량한복을 입은 서명원 신부의 모습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가 왜 바로 여기에 함께 있을까’를 생각하면 항상 신비하다”며 눈을 반짝였다. |정지윤기자
-그냥 감상에서 끝낼 수도 있는데 불교에 대한 석·박사 논문을 쓰는 등 공부를 계속 하신 이유는 뭡니까.
“선천적인 성격 때문인지 처음 수도 생활을 시작했을 때부터 다른 문명을 만나고 싶었어요. 중국, 이슬람 계통의 한 나라, 소련 중 한 곳으로 갈 수 있었는데 한국에 오게 됐지요. 한국은 깊이가 있는 나라인데 한국 사람들은 그것을 몰라요. 한국 문화에 대해 좋게 생각하지 않는 분도 있고요. 그렇지만 저에게 한국 문화는 소중합니다. 그런 한국에 깊이 있게 들어가려면 뭔가를 택해 공부를 해야 합니다. 불교도 안으로 들어갈수록 다른 갈래가 있고 끝이 없습니다.”
-박사 논문 주제는 성철스님에 대한 것입니다. 왜 성철스님입니까.
“당시에는 한국 불교에 대한 영어 책이 많지 않았어요. 그리고 제가 한국어에 대한 독해력도 부족했고요. 그래서 영어로 되어 있는 한국 불교에 대한 책을 읽었지요. 한국 불교를 가르치는 UCLA의 로버트 버스웰 교수의 송광사 수행기인〈눈 푸른 납자(The Zen Monastic Experience)>를 읽고 그때 돈점(頓漸) 논쟁에 대해서 접했어요. 그리고 바로 ‘아, 이게 나의 박사논문 주제가 되겠구나’라고 느꼈어요. 그리고 성철스님과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이죠.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제가 한국 불교로 들어간 것이 성철스님을 통해서였어요. 원효도, 서산대사도 아니고 성철스님을 통해서지요. 어떤 사람들은 저에게 한국 불교를 영원히 모를 것이라고 비판을 하기 시작했는데 성철스님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이었지요. 또 어떤 사람들은 첫 단추부터 잘못 달았다고 얘기하기도 했고요. 처음에는 왜 그러는지 몰랐는데 이제는 다 압니다.”
-불교 경전을 읽고 연구를 하고, 다시 프랑스어로 논문을 쓰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눈병에 걸릴 정도로 책을 봤어요. 결막염에 몇번 걸렸지요. 중국어도 있고 한국어도 있기 때문에 책을 여러 번 숙독했어요.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이라고 하잖아요. 또 책을 백번 읽어서 가죽끈이 끊어졌다고도 하고요. 그렇게 읽었습니다. 형광펜으로 표시하고 줄 긋고 뜻을 찾아서 적고 나중에는 공간이 부족해 쪽지를 붙여놓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읽고 뜻을 이해했더라도 이 말을 다시 모국어로 번역해 논문을 써야 하기 때문에 더 힘들었어요. 읽을 때 ‘아, 이 뜻이구나’ 했는데 표현하려니 한 단락 번역하는 데 몇시간씩 걸리는 거예요.
그렇지만 그런 과정을 겪고 나니까 독해력이 강해졌어요. 정확성도 생겼고요.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도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계속 올챙이적을 생각을 할 수밖에 없어요. 아무리 개구리가 되었다고 해도. 왕개구리가 되어야 해요. 지금은 작은 청개구리 정도예요(웃음).” (서 신부는 ‘성철스님의 생애와 전서(全書)’라는 논문으로 파리7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선문정로(禪門正路)> <육조단경(六祖壇經)> <백일법문(百日法門)> 등 성철스님 법어집을 수십번 읽었다고 한다.)
-성철스님을 아주 가깝게 느끼시는 것 같네요.
“함께 붙어서 살았다면 많이 싸웠을지도 모르겠어요. 성격이 고약하셨다고 들었거든요. 원택스님께서 ‘성철스님을 25년간 모신 것이 쉽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어요. 성철스님께서 열반에 들어가서 저에 대해 아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 분과 인연을 맺었다고 생각해요. 만나 뵌 적도 없지만 책을 통해서 친견했다고 생각해요. 체취까지도 맡은 셈이에요.”
-신약성서에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돈오점수(頓吾漸修)가 모두 포괄돼 있는 것으로 해석한 신부님의 논문을 인상깊게 보았습니다. 논문에는 단박에 깨쳐서 깨달음이 이뤄지는 돈오돈수는 그리스도에 해당하고, 점진적 수행을 거쳐 깨달음에 이르는 돈오점수는 예수의 제자에게 나타난다고 되어 있더군요.
그리스도교가 처음에는 중동에서 생겼지만 서양으로 들어올 때 희랍 철학의 개념으로 새롭게 해석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서양에서 아시아로, 한국으로 들어온 그리스도교는 서구적이거든요. 그런데 그리스도교와 불교가 여러모로 상당히 가깝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성철스님께서 제가 그리스도의 경전을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빛을 제공해주신 겁니다.”
“원택스님으로부터 직접 들은 얘기는 아니고 책에서 본 것인데요. 원택스님이 성철스님을 만나 뵈러 갔을 때 한 마디만 말씀해 달라고 하셨답니다. 그런데 성철스님이 ‘절 돈’을 달라고 했대요. 원택스님이 무슨 소린지 몰라서 지갑을 꺼내 몇 천원을 내놨더니 성철스님은 ‘그 돈 말고 절 돈, 그러니까 부처님 앞에서 절하라’고 했다고 하더군요. 성철스님의 말을 못 알아들었기 때문에 결국 원택스님은 1만5000배를 하셔야 했대요.
그 절을 다 하고 나서 원택스님이 받은 말씀은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것이었답니다. 수행의 과정이 뭐냐면 결국 나 자신을 속이지 않고, 남을 속이지 않고, 그리고 진리를 속이는 것을 벗어나는 거죠. 진리와 통합돼서 사는 거죠. 진짜 깨달은 사람은 더이상 속임없이 사는 사람인 거죠. 저도 저를 속이지 않고 살아가려고 합니다.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것은 수행의 전체이지요.”
이웃 종교에 서로 귀기울여야
-가톨릭 사제로서 믿음 없이 불교를 공부하는 것에 한계가 있지 않나요.
“한 종교계 인사가 저에게 ‘가톨릭 사제가 불교에 대해 뭘 알 수 있겠느냐’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그 말은 웃으면서 받아들였고요(웃음). 그런 식으로 얘기를 한다면 저는 한국말도 배울 수 없고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도 가질 수 없는 것이지요. 문화와 문화, 종교와 종교 간에는 어쩔 수 없는 장벽이 있을 수밖에는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저는 공통된 바탕이 있다고 봐요. 다르니까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올바른 주장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모국어는 프랑스어니까 한국어를 구사할 때 프랑스어식 억양이나 표현법이 작용할 수밖에 없어요. 어쩔 수 없는 모국어니까요. 그렇지만 한국말을 배우다보니까 저의 사고방식이 엄청나게 많이 달라졌어요. 제 말씀은 제가 한국 사람이 될 수 없고, 한국 사람처럼 한국말을 구사할 수는 없지만 한국 사람과 문화를 사랑하고 그것을 발견하면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는 겁니다.
-한국의 종교문화가 많이 폐쇄적입니까.
“제가 제3자로서 보는데 한국은 ‘우리’의 개념이 엄청나게 강합니다. 그런데 겉으로는 ‘우리’라고 하지만 그 ‘우리’ 안으로 들어가면 벽이 많아요. 종교 간에도 마찬가지예요. 종교 간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다 똑같다’ ‘모두 진리를 향해 있다’면서 차 한잔 나누고 이야기를 하지만 서로를 깊이 이해하려고 충분한 노력을 하고 있지는 않다고 봐요. 바꿔 말하면 저처럼 불교를 본격적으로 공부하는 또다른 가톨릭 사제들이 있습니다. 불교에서도 똑같이 해야 한다고 봅니다. 불자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교를 가볍게 생각하거나 선입견을 통해 다루기보다는 좀더 전문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배워야 한다는 거지요. 정말 열린 마음으로 그리스도교에서 무엇인가를 배우려는, 그리스도교를 깊이있게 생각하는 불자를 본 적이 없어요. 이웃 종교의 가르침에 서로 귀기울이지 않은 것이죠.”
-폐쇄적인 종교문화의 바탕은 어디서 온다고 생각합니까.
“역사적으로 보면 한국 불교는 조선시대, 일제강점기, 이승만 정권 아래에서 계속 박해를 받았어요. 이승만 정권 당시에 불교가 미약해졌을 때 그리스도교가 종파를 막론하고 들어온 것이죠. 불자들의 힘은 독재정권 아래에서 회복되기 시작했어요. 그러니 불교와 그리스도교 사이에 관계가 좋을 리가 있었겠습니까. 결국 그 이후엔 종교들 간에 교세를 확장하려는 문제가 들어가지요. 이게 종교 간 알력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더 사적인 문제로 들어가 봅시다. 결혼할 때 개종을 요구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아시잖아요.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어요. 이건 일종의 폭력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이것 역시 조화가 아니라고 봅니다. 지난해에 종교계에서는 이명박 정부의 종교편향과 불교계의 반발이 있었습니다. 정부에서는 ‘오해’라고 했지만 불교의 입장에서는 ‘오해 그 이상’으로 볼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불자들이 생명에 대한 위협감을 느낄 정도로 참으로 많이 긴장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우리나라에서는 종교 갈등으로 인해 전쟁이 일어난 적이 없다’고 말하는데 제3자의 입장에서는 불안요소들이 많다고 봅니다. 다만 한국 사람들은 단일민족이기 때문에 핏줄을 나눈 것이 종교 간의 알력을 초월한다고 믿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종교 간의 화해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우선 선입견을 버려야 합니다. 종교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얻을 게 있잖아요. 똑같다면 배울 게 없죠. 서로 다른 점이 무엇인지 발견해 자기 종교를 더 풍요롭게 해야 합니다. 이웃 종교에 대해 배우려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또 잘못 알고 함부로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스도교는 폭력적인 종교다’라는 비판을 많이 듣는데요, 물론 그리스도교의 이름으로 사람들이 일으킨 전쟁은 엄청나게 많습니다. 이라크 전쟁, 아프간 전쟁, 가자 폭력도 엄청나게 큰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잠을 못 이룰 정도였습니다.
그렇지만 반면에 불교가 오로지 평화스러운 종교라고 주장하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불교의 이름으로 이뤄진 폭력적인 사건도 많았습니다. 스리랑카 불교만 해도 지금은 타밀족이 자치권을 얻지 못해 마지막 항쟁을 하고 있잖아요. 이게 불교 정신인가요. 티베트의 종파 간 갈등뿐만 아니라 인도차이나 반도 안에서도 태국, 버마, 캄보디아가 상당히 많이 싸웠습니다. 불교에서 폭력이 전혀 없었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이렇게 낮은 수준에서 종교를 비교하는 것, 아전인수격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남을 함부로 비판하는 것이 됩니다. 다른 종교에 대한 비판을 하려면 그렇게 하기에 앞서 자기 종교에 대해 최소한 그만큼의 비판을 해야 해요. 저는 학생들에게 불교에 대한 비판적인 얘기를 하지 않고 불교를 미워하게 가르치지도 않아요. 만약 안좋은 이야기를 한다면 그리스도교의 약점에 대해서도 그만큼 말합니다.”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 당시 종교를 초월해 많은 사람들이 추모와 애도의 물결을 이뤘습니다. 종교 간 화해의 싹이 될 수 있을까요.
“매우 좋은 사건이지요. 영어로 말하자면 그 사건이 모멘텀이 될 것인지, 그 사건을 바탕으로 종교 간 대화를 이루기 위해 애를 쓸 것인지 궁금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한국에서 학생들에게 불교를 가르칠 생각입니까.
“뼈를 묻을 때까지요. 65세가 정년이니까 앞으로 10년 동안 더 가르쳐야 되고요. 동·서양에서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더욱 더 활발하게 만날 수 있게 제가 뭔가 이바지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어요. 또 제가 불교를 통해 얻은 수많은 것들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알려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남아있는 인생 동안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서로를 깊이 사귈 수 있게 노력해야 한다는 걸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 일을 하다가 세상을 떠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겁니다. 한국에서 죽어도 괜찮고, 벽제에 가서 이 몸을 불살라 버려도 괜찮습니다.”
의학공부하다 84년 수사로 한국과 인연
‘성철스님의 생애와 전서’로 박사학위
서명원 신부는 2005년부터 서강대 종교학과에서 불교를 가르치고 있다. 1984년 예수회 한국지구로 파견돼 한국에 첫발을 내디뎠고 사제품을 받기 위해 프랑스로 돌아간 몇 해만 제외하곤 꼬박 열아홉해를 한국에서 보냈다.
처음 방문한 이름 모를 한국 사찰에서 풍경 소리, 향 냄새, 단청을 만난 뒤 한국 불교의 매력에 빠졌다. 93년 로버트 버스웰 교수가 쓴 <눈 푸른 납자(The Zen Monastic Experience)>를 읽고 성철스님과 돈점 논쟁을 처음 접한 그는 ‘바로 이것이 내 박사논문 주제가 되겠구나’라고 느꼈다고 한다. 그 후 10년에 걸쳐 성철스님 법어집을 읽고 또 읽었고 2004년에는 ‘성철 스님의 생애와 전서(全書)’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지선·최희진기자/사진 정지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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