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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칼럼+옴부즈만

[시론]KBS 사태와 국가개조론

‘국민의 방송’을 내세워온 KBS가 벼랑 끝으로 치닫고 있다. 보도와 제작의 중추인 부장급 이상 거의 모든 간부들과 1, 2노조, 그리고 사내 기자협회가 파업에 돌입한 지 벌써 일주일째다. KBS 전체 구성원의 80% 이상이 일손을 놓은 것으로 집계된다. 요구 조건은 단 하나로 길환영 사장의 퇴진이다.

5일 오후 KBS 이사회가 길 사장 해임제청안에 표결할 예정이다. 노조의 한 핵심 간부는 “여권 이사들에게 청와대가 개입하는 징후는 없다”고 전했다. 표결이 그들의 양식에 맡겨져 있다는 얘기다. 7명의 여권 추천 이사 중 3명이 현직 교수다. 이들의 제자인 KBS 사원들이 찾아가 “학교에서 가르쳐준 게 이런 것은 아니지 않으냐”며 이사회에서 결단을 요청했다고도 한다.

길 사장은 자신의 퇴진을 요구하는 간부들에게 보복인사로 대응했고 기자들은 사장을 방송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KBS가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국민의 눈과 귀 노릇을 자임해온 저녁 9시 뉴스는 파업 이전의 절반 수준으로 축소됐다. 취재기자의 리포트가 사라졌고 대부분 동영상이 나갈 자리에 스틸 사진이 다량 등장했다. 뉴스 앵커는 스튜디오를 떠나 거리에서 1인시위를 벌였다. 모든 프로그램의 정규직 고정 앵커가 전원 교체됐다. 아침 뉴스와 교양프로그램 상당수가 결방했다. 이런데도 ‘시청자의 이익을 현저히 저해’할 경우 방송법 규정에 따른 시정명령을 내려야 할 방송통신위원회가 방관할 수 있단 말인가. KBS는 재허가 심사 때 스스로 제출한 사업계획서상의 주요 프로그램 편성계획을 이미 이행하지 못하고 있다. 이 또한 방송법상의 시정명령 요건에 해당한다.

kbs 사태 일지


팔짱 낀 채 지켜보기만 하던 방통위는 지난달 26일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에서 처음으로 집중타를 당했다. 야당만의 정치공세가 결코 아니었다. 언론인 출신인 새누리당 이상일 의원은 최성준 방통위원장에게 방송정책기구가 무언가를 해야 하지 않느냐고 강하게 따졌다. 새정치민주연합의 전병헌, 유승희 의원 등은 방통위원장의 직무유기라고 질책했다. 강동원 의원은 더 이상 직무유기를 하면 탄핵감이라고 발언수위를 높였다. 방통위 상임위원 회의에서 KBS 사태에 대한 긴급발언과 자료제출요구안 상정 등 연 4주째 악전고투해온 나로서도 탄핵 발언에 충격을 받았다. 최성준 위원장은 KBS에 자료제출을 요구하겠다고 답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료제출 요구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방송법 위반 여부를 파악하는 데 있다. 방송법 위반 혐의는 김시곤 전 보도국장의 내부고발로 불거졌다. 길 사장이 여러 간섭을 했다는 얘기다. 방송법은 ‘누구든지 방송편성에 관하여 법 절차에 의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규제나 간섭도 할 수 없다’고 못박았다. 최고경영자인 사장은 편성권을 공유하므로 간섭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반론도 있다. 그러나 방송법에 근거한 KBS 편성규약은 방송사업자로서 사장과 편성책임자를 명확하게 구분해 놓았다. 사장은 편성권 영역에 포함되지 않는다. 따라서 사장이 보도국장에게 간섭했다면 편성규약과 방송법 위반에 해당된다. 그 진위를 가리지 않고서는 국민 여론이 가라앉기 어려울 것이다. 방통위가 KBS 내부고발과 길 사장의 해명에 관련된 자료를 요구하지 않는다면 방송법의 집행기관으로서 또 하나의 직무유기가 아닐 수 없다.

KBS는 3대 선거의 하나인 이번 지방선거에 대하여 제대로 보도하지 못했다. 대다수 시청자들이 기다리는 브라질월드컵 개막이 열흘도 안 남았지만 취재 준비가 불능 상태다. 박근혜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국가개조를 역설했다. KBS를 제대로 된 공영방송으로 세우기 위한 대수술이야말로 국가개조의 중요한 아이템에 속한다. KBS는 민영방송과 달리 국가기간방송으로서 국민의 준조세인 수신료를 주요 재원으로 운영되는 공영방송이고 재난방송의 주관기관이기 때문에 국가개조의 대상이 된다. 보도나 편성 내용에 정부가 개입하라는 것이 아니다. 사장 임명을 비롯한 지배구조와 공정방송위원회의 구속력 있는 운영 등을 개편한다면 국가백년대계의 주춧돌을 세운 공적으로 기록되리라는 뜻이다.


김재홍 | 방송통신위원회 상임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