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혁당, 유신, 협박, 사찰, 혼외 임신과 낙태. 2012년 9월 현재, 대통령 선거 관련 키워드들이다. 사안의 내용을 살피기 이전에 아직도 이런 주제어들을 중심으로 선거과정이 진행된다는 사실이 답답하다. 현대 문명사회의 선거의제라 생각하기에는 너무도 극단적이다.
선거전이 진행되면서 유권자들을 혼란에 빠뜨릴 가능성이 높은 정치적 주장들과 이전투구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정치권의 논쟁은 선전(propaganda)전과 유사한 특성을 보이고 있다. 밝혀진 사실 중심의 논의보다는 의견 중심의 언쟁을 한다. 이 때문에 실체적 진실에 근거한 주장이 아닌 관념적 평가가 합리적 주장처럼 포장된다. 출처가 불분명하고 사실관계가 드러나지도 않은 내용들이 확인된 사실처럼 흘러나온다. 복잡해 보이는 상황이 전후 맥락에 관한 설명 없이 단순화되어 전달되기도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이야기들은 대중의 스키마를 자극하여 사실처럼 회자된다. 대중정치에서 자신의 편을 단단히 묶어내고 부동층을 흡수하는 데 이 같은 전략 이상의 것은 없다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책임 있는 언론의 역할은 더욱 중요하다. 언론은 무엇보다 우리의 정치현실, 좁게는 현재의 선거현실을 독자들에게 차분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우리 정치가 30여년 전 이야기들을 되풀이하게 된 이유, 정책선거의 가능성이 희박해 보이는 이유, 사회의 정치구조와 수준, 국민들의 정치의식 등에 관한 성찰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독자들에게 우리 사회의 정치를 객관화하여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구체적 사안에 관한 보도에서는 사실관계를 그 어떤 주장보다 강조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실이 확인되지 않은 의견은 말싸움이나 견해차 이상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특히 협애한 개인적 경험에 의존하거나 막연한 신념들이 충돌할 때 일반화된 사실관계를 조명하는 것은 합리적 사유를 이끌어내는 데 필수적이다. 주장을 보도할 때는 주장이 있다는 사실과 확인된 내용은 어디까지인지를 명확히 해야 한다. 시간적으로 어려워 보이나 부분적으로라도 정책선거가 될 수 있도록 후보들의 정책을 분석하고 설명하는 데 역량을 기울여야 함은 물론이다.
영정들고 오열하는 인혁당재건위 사건 유족들 (출처: 경향DB)
경향신문은 이 같은 면에서 일정한 성과와 한계를 동시에 보였다. 최근 경향이 집중한 안건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었다. 이 보도에서 사실관계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돋보였다. 사건의 실체를 밝혀진 사실에 기초해 조목조목 반복해서 설명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이름이 알려져 있다고는 하나 일반 독자들, 특히 젊은 유권자들이 30여년 전 사건의 세부내용을 알고 있기는 어렵다. 역사적 사건에 대한 충실한 설명은 독자들의 합리적 판단을 돕는 근거가 된다.
지면을 쪼개 대선 후보들의 정책을 보도하고 후보들 간 정책의 차이를 비교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후보들의 언급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경제민주화, 평등, 복지 등 구호들이 떠다닐 뿐 구체적 데이터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막연한 내용이 많다. 이것은 정책개발자인 후보들이 제대로 준비된 정책을 갖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언론은 실현가능성을 구체적으로 반론해야 한다.
정치권의 네거티브 프레임 내에서 보도를 하다 발생한 문제도 있다. ‘혼외 임신과 낙태’라는 상대당 관계자의 확인되지 않은 말을 인용했다가 정정 보도를 내고 사과하는 일이 있었다. 선전정치에 몰입되어 있는 취재원들의 입을 쫓다보니 발생한 문제다. 그럼에도 다른 확인 없이 인용부호를 달아 보도하는 기사들은 아직도 많다. 대변인들을 비롯한 정치인들의 발언은 책임 있는 사람들의 언급이므로 보도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확인여부는 정확히 해야 한다. 인용은 특정한 내용에 대해 발언했다는 것이지 그 말이 사실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확인되지 않은 주장을 보도해야만 한다면 사실여부는 알지 못한다는 첨언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 같은 첨언은 기사의 스타일을 생각하면 사족 같아 보이나 독자들의 해석에는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우리 정치현실에 대한 객관적 평가는 부족하다. 기사들을 통한 간접적 설명은 어느 정도 있었지만 이제는 본격적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우리의 선거 키워드에 상식 밖의 내용이 많은 이유부터 시작해 보자. 우리 사회가 자유화된 것은 불과 25년, 민간정권이 들어선 지는 채 20년이 되지 않았다. 시민사회가 일천하며 절대국가의 유산들이 광범위하게 잔존한다. 정치철학과 의식, 과정과 커뮤니케이션 방식에 이르기까지 과거를 털어버리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심지어 과거의 방식과 논리로 정치사회화 된 후속세대들이 등장하기까지 한다. 세계사를 보자. 민주주의란 단기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언론의 역사의식과 실천이 필요한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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