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주웅 | 호루라기재단 상임이사
근자에 들어 경향은 진보 일각의 이른바 ‘진영논리’에 대해 날카롭게 각을 세워 왔다. 곽노현 교육감 사건에서부터, ‘나꼼수’와 김용민의 막말 논란에 이르기까지 경향의 비판은 가차 없었다. 이러한 논조를 펼친 것은 “진보적 가치를 지지하는 만큼 그들에게는 더 높은 도덕성이 필요하다”(3일자 사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드러난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경선의 “총체적 부실·부정”에 대해서는 그리 높은 잣대를 들이댈 필요도 없는 것 같다. 절차적 민주주의는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정치집단이라면 누구나 지켜야 할 기본 규칙에 해당한다. 더 도덕적이어야 한다고 요구하면 왜 진보에게만 그런 기준을 덧씌우느냐는 볼멘소리가 들려온다. ‘조·중·동 프레임’이니 하는 논리도 끼어든다. 그러니 이제 진보에 대해서는 도덕적 가치를 거론할 것도 없이 상식에 근거를 두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다.
통합진보당 19대 총선 비례대표 경선 투표 부정행위 (경향신문DB)
그렇다면 진보 진영에 대한 ‘진보적 매체’의 비판은 ‘조·중·동’과는 어떤 점에서 달라야 할까? 다를 것도 없이 이번 진보당 사태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신문이 한결같은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3·15부정 선거의 2012년 판”(3일자 5면), “전두환 시대나 하던 짓”(3일자 6면)이라는 경향의 개탄은 “체육관 선거도 이 정도는 아니다”(중앙), “그날 진보당의 민주주의는 죽었다”(조선) 등의 보수언론의 질타와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비례대표 부정선거의 원인을 당권파의 패권주의에서 찾는 것 역시 대동소이했다. 당초 당 진상조사위원회의 발표는 광범한 부정 투표가 일어났음을 인정했지만, 구체적으로 누가 어떻게 부정을 자행했는지를 밝혀내지 않았다. 그런데 경향은 곧바로 “선이라 믿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당권파의 패권주의”(3일자 5면)에 화살을 돌렸다.
과거 민주노동당 시절부터의 사례가 있고, ‘경기동부연합’으로 대표되는 당내 패권주의가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니 틀린 분석은 분명 아니다. 하지만 그 근거가 “부정투표로 이익을 본 당권파가 주도했을 것으로 의심하는 관측이 많기”(3일자 2면) 때문이라면 어딘가 부족하다. 엄밀히 말하면 당 공식 기구의 조사결과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기득권에 집착하는 것이 문제이지, 그들이 부정선거를 주도했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에 비난받아야 하는 건 아니지 않을까.
당권파(주류)의 문제에 집중하는 보도는 진보당 내부 구성이나 수습책을 다룬 대목에서도 나타난다. 예를 들면 4일자 6면 기사의 제목은 “당권파, 진보당 지분 55% 장악”으로 되어있는데 이는 지난해 11월 ‘한 지붕 세 가족’이 합칠 당시의 계파간 합의사항으로서, ‘장악’이라는 표현은 지나친 느낌이 있다. 이 역시 당내 구성보다는 다수파의 패권적 행태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태가 확대된 후에도 이들의 안이한 인식은 경향의 4일자 단독보도(“당권파, ‘당권 줄게 지분 보장하라’ 거래”)로 폭로됐다. 이에 대해 바로 진보당 측은 사실무근이라며 보도 자료를 냈다. 사태의 경과와 정황에 비추어보면 신빙성 높은 보도였지만, 그래도 당사자들의 부인은 언급되었어야 했다.
정당사에 유례없는 이번 사태의 해결책과 대안은 무엇일까. 경향의 사설은 우선 “지도부의 단호한 행동을 기대”(3일)하며 “당권파의 2선 후퇴가 해결의 첫걸음”(4일)이라고 말한다. 구체적으로는 당권파인 비례대표 1~3위의 사퇴 여부에 주목했다. 그러나 투표 자체가 원천 부정이었으니만큼 경선에 나선 모든 후보의 순위가 무효로 되어야 한다는 논리는 소개되지 않았다. 또한 특정인의 주도가 팩트로 확인되지 않았으므로 선거 관리에 책임을 지고 당직자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논리상 맞지 않을까. 당권파나 당직자나 거기서 거기일 테지만 말이다.
진보로 일컬어지는 진영의 잘못에 대해 진보적 언론은 서릿발 같은 비판을 해야 하는 것이 옳다. ‘재구성’된 지 6개월도 안되어 위기에 처한 진보당이 국민의 신뢰를 얻으려면 근본까지 파고드는 반성과 쇄신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매 맞는 쪽에서는 더 없이 아플 것이다. 이른바 “애정 어린 비판”을 주문하기도 한다. 어떤 것이 애정일까?
물론 경향은 예의 ‘색깔론’이나 ‘야권연대 폄훼론’, ‘검찰 개입론’에는 분명한 선을 그었다. 과거 민주노동당과 정면충돌했던 당시의 ‘종북 코드’도 건드리지 않았다. 비록 엉망이 되고 말았지만 다른 당과 달리 비례대표를 당원의 직접투표로 선정했다는 점을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언론의 정도에 더욱 충실하는 것이 참된 ‘애정’이라고 본다. 그것은 사실의 중시, 그에 대한 객관적이고 공정한 해석, 적절한 반론 보장, 그리고 특히 설득력 있는 해결책과 대안의 제시로 요약된다. 모두가 돌멩이를 던질 때 더 큰 돌과 함께 상처에 바를 약도 준비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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