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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칼럼+옴부즈만

젊은이들 문제의식에 주목을(옴부즈만)

신지혜 이화여대 언론정보학과 4학년
 지난주 경향신문은 외국발 뉴스를 많이 전달했다. 지면 비중만 보면 마치 국제면이 정치, 사회면까지 장악한 느낌이다. 지난주 경향 1면에는 이틀 연속으로 미국인 얼굴이 실렸다. 4일에는 중간선거에서 승리한 미국 공화당 하원원내대표의 (감격에 겨워)울먹거리는 표정을, 5일에는 웬디 커틀러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보의 ‘달콤살벌한’ 웃음을 포착했다. 무엇보다 중간선거에서 72년 만에 가장 많은 의석을 잃은 오바마 대통령 소식이 컸다.
 
 이 와중에 몇몇 유의미한 뉴스가 있었다. 주로 노동자들의 소식이다. 지난 1일 기륭전자 해고노동자들이 일부 복직했다. 노상 투쟁한지 햇수로 5년만이다. 다음 날에는 동희오토의 협상이 타결됐다. 경향은 사설을 통해 이번 합의가 비정규직 문제 해결의 계기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2일자 35면)


 하지만 경향은 근로자들의 권리가 향상됐다고 단언하지 않았다. 경향은 5일자 5면 <한국 사회 흐름을 바꾼 ‘죽음’…그러나 끝나지 않은 ‘투쟁>에서 ‘전태일의 투쟁은 현재진행형’이라고 규정했다. 노동자 인권 등 사회문제에 대한 감수성은 많이 확산됐지만 현실적인 실천이 미흡하다는 분석이었다. 해당 기사에는 70년대 전태일의 분신에 자극을 받아 노동운동에 뛰어든 대학생들이 꽤 비중있게 묘사돼 있었다. 정치, 사회적 변화를 감안한다 해도 오늘날 대학생들과는 매우 다른 모습이었다. 이런 점은 종종 ‘세상과 담 쌓은 20대’라는 비판의 주된 근거가 되곤 한다.



이화여대 학관에서 4일 열린 ‘시간을 되돌리는 작은 교실’에서 미화 노동자들이 컴퓨터 사용법을 배우고 있다. 노동자들의 눈빛이 사뭇 진지하다. | 김문석 기자

 하지만 경향은 우회적인 비판방식을 취했다. 예전과 달라진 젊은이들의 무관심을 직접 언급하는 대신, 전태일의 문제의식을 함께 하는 대학생들의 활동을 기사화했다. 이대, 연대 학생들이 학내 미화원 아주머니들에게 컴퓨터 강습을 한다는 기사였다. (5일자 11면 <”뒤늦게 컴퓨터도 배우고…학생들이 고맙죠”>) 학교 측이 컴퓨터실 사용 허가를 내주지 않는 바람에 외부에서 노트북을 빌려 수업을 진행해야 하지만 반응이 좋다고 한다.

 사실 기사 내용보다도 이 소식이 ‘뉴스거리’가 됐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신문이 특정 대상에 주목한다는 것은 그것이 뉴스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스물 한 살 대학생이 일주일 중 몇 시간을 쪼개서 미화원 아주머니에게 컴퓨터를 가르쳐 주는 것은 작은 일일 뿐이지만, 아주머니의 삶은 크게 바뀔 수 있다는 것이 컴퓨터교실을 연 학생들의 생각은 아니었을까. 경향이 이런 대학생들의 움직임을 포착했다는 것이 고마웠다.


 지난 6일 오후 7시로 예정된 문정현신부 헌정공연(‘가을의 신부, 길 위의 신부’)을 앞두고 몇 시민단체 회원 30여명이 모여 저녁을 먹었다. 그 자리에서 한 중년 여성이 “우리 딸이 경향신문을 보는데, 이러다 좌파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고 농담 삼아 말하자 한 인권단체 변호사가 “그게 제 자리 찾아가는 겁니다”라고 응수했다. 대학생의 ‘제 자리’가 무조건 ‘왼쪽’이라는 발언은 아니었을 것이다. 기성세대의 가치를 답습하기보다, 세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젊은이의 의무라는 뜻은 아니었을까. 다만 ‘인권이라는 잣대로 비판하는 것을 곧 정부에 대한 공격이라고 생각하는’(2일자 4면 <”인권, 정권 공격한다는 시각부터 바꿔야”>) 잘못된 부등호가 만연한 상황에서 세태 비판이 곧 ‘좌익’으로 몰리는 길이 될 수 있으니, 좌파 되는 것이 곧 제자리 찾아가는 것이라는 변호사의 말도 일리는 있다. 요지는 젊은이라면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전태일의 죽음은 70년대 대학생을 노동운동에 뛰어들게 한 기폭제였다. 오는 13일 전태일 분신 40주기를 앞두고 신문들이 바쁘게 생산하는 특집기사에서 전태일의 사회적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대학 캠퍼스는 고요하다. 한참 하반기 기업채용이 막바지에 접어든 시기라 더욱 그렇다. 이미 대학가에서 전태일이니 노동조합이니 하는 담론은 이미 빛 바랜 흑백사진 같아 보인다. 경향이 지적한 대로 전태일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반면, 대학생의 고민은 급속히 개인적 차원으로 수렴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산재한 사회문제에 대해 물음표를 다는 대학생 역시 많다. 다만 이들의 문제의식이 생존경쟁 일변도의 분위기에 공론화되지 못하고 사장되는 경우가 많다. 노동자문제를 포함해 사회에 대한 젊은이들의 문제의식과 그에 대한 노력을 경향이 자주 주목해주었으면 한다. ‘이런 부분, 참 잘했다’라고 다독이는, 그리고 조심스럽게 ‘이런 노력에 함께하고 싶지 않니’라고 속삭이는 언론이 되기를 바란다. 특히 전태일 분신 40주기를 맞이하는 지금이 젊은이들의 문제의식을 발굴할 적절한 시점이 아닐까. 젊은이들의 고민 역시 ‘현재진행형’일 수 있는 계기를 경향이 꾸준히 마련해 주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