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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칼럼+옴부즈만

드라마 <대물>이 위험해 보이는 이유

이영미 대중문화평론가

“정치권이 당리당략을 위한 정쟁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국민을 위하는 길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때입니다.” 라디오 시사프로 앵커가 전문가의 정치뉴스 분석을 듣고 난 후 이런 멘트로 정리를 하면 갑자기 맥이 빠진다. 말이야 옳은 말이다. 하지만 그 맥락이 문제이다. 전문가가 해당 사안에 대한 각 당의 이견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열심히 정책분석을 통해 설명했건만, 이를 다 듣고 난 앵커의 마무리 멘트가 “정쟁에만 매달리지 말고”, “진정으로 국민을 위하는 길” 운운이라니. 이 말이야말로 여태까지의 모든 정책 분석을 ‘도루묵’으로 만들어버리고, 그저 정치권의 싸움은 모두 당리당략을 위한 것이라고 싸잡아버리는 효과를 낳는다. 앵커가 전문가의 분석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정치허무주의를 부추기려는 의도였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어느 쪽이든, 단순한 싸움처럼 보이는 상황을 분석하여 그 정책적 의미를 드러내주어야 하는 시사프로의 앵커로서는 낙제 수준이다.
 
 의학드라마를 내세운 드라마에서도 가장 황당한 대사가, 착한 주인공이 흥분해서 내뱉는 “진정으로 환자를 위하는 길이 뭔지 생각해 보라고!” 같은 말이다. 아, 이런 하나마나한 소리가 다 있나! 환자의 치료에 의학적인 의견이 갈려 논쟁이 벌어져 있는 이런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의학적인 논쟁이다. 냉철한 논쟁으로 상대방을 설득해야 마땅한 주인공 의사는, 맥 빠지게 지당한 말씀을 내뱉음으로써 동료 의사를 ‘환자를 위하지 않는 나쁜 의사’로 매도해 버리고, 의학적 논쟁을 더 이상 진행할 수 없도록 만들어버림으로써 환자를 위한 최선의 치료를 할 수 없도록 만든다. 그런데도 창작자들은 이런 대사가 감동스러운 대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런 손쉬운 ‘감동적 명대사’에 의존하는 의학드라마는, 의학을 포기하고 그저 단순한 선악대결의 드라마로 전락한다.


 드라마 <대물>도 이런 대목에서 위태위태하다. 지난 주, 국회의원이 된 주인공 서혜림(고현정 분)이 방송토론에 나가서 “(국민) 여러분이 정치인들 종아리에 회초리를 쳐서 국민들을 표 찍어주는 사람으로만 아는 오만불손함을 타이르고…”라고 말하여 감동을 이끌어내는 장면이 화제가 되었다. 초선 국회의원이 된 서혜림이, 법안 처리에서 당론의 거수기가 되기를 거부한 이후에 행한 일이다. 국회의원이 조폭들처럼 몰려다니며 몸싸움에 나서고 거수기가 되는 정치현실을 고스란히 재현한 드라마 속 장면들은 꽤나 충격적이었고, 그 덕분인지 이 대사에 많은 시청자들이 공감을 표했다.


 하지만 나는 역시 기분이 ‘살짝’ 나빴다. 말이야 구구절절 옳은 말이다. 하지만 도대체 누구에게 어떻게 회초리를 들어야 한단 말인가. 이 드라마 어디에서도 그 법안의 내용이 무엇인지, 양당이 어떤 이유에서 그 법안을 찬성하고 반대하는지를 알려주고 있지 않다. 서혜림의 정책과 능력 역시 알 도리가 없다.


 국민이 정치인의 버릇을 가르치려면 실력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정치에 대한 단순한 불신을 넘어서서, 그들의 정책과 능력을 조근조근 뜯어 읽고 평가하는 능력을 갖추어야 가능하다. 오랫동안 민주/반민주의 단순 대립 속에서 살아오느라, 우리 국민들은 좀 더 복잡한 정책 분석 능력을 키우지 못했다. 정치권의 싸움이 자신에게 무슨 의미인지 잘 읽어내지 못하므로, 정치권의 싸움은 그저 개싸움이라고 치부해 버리고, 선거 때에는 비현실적 희망을 갖거나 경마 관람 하는 태도를 취하게 되는 것이다. 정치가 우리에게 주어야 하는 것이 값싼 감동이 아니라 올바른 정책임을, 이 드라마는 과연 알려줄 수 있을 것인가.